쉿! 내 재산이 어디 있는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여왕님의 꼼수
가디언, 1970년대 정부 메모 입수..주식 공개 면제 특혜
[경향신문]
“여왕이 어떤 주식을 갖고 있는지 공개되면 당혹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다.” 1973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개인변호사 매슈 패러는 통상산업부 장관을 만나 정부가 추진 중인 법안을 두고 왕실의 우려를 전했다. 주식 소유주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법안 때문에 여왕의 사유재산이 드러날까봐 로비를 펼친 것이다. 결국 로비는 성공했고 여왕은 2011년까지 유령회사를 통해 주식투자를 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7일(현지시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정부 메모들을 통해 여왕이 사유재산을 숨기기 위해 대정부 로비활동을 벌인 정황이 포착됐다고 전했다.
당시 보수당 정부를 이끈 에드워드 히스 총리는 상장기업들의 이사회가 기업 지분을 가진 유령회사나 명의자들에게 실소유주 공개를 요구하면 유령기업들은 고객의 신원을 공개해야 한다는 법안을 추진 중이었다. 유령회사를 통해 상장법인에 투자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 소식에 다급해진 건 왕실이었다. 여왕의 재산은 수억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규모와 투자처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왕은 개인변호사를 관련 부처에 보내 압박을 가했다.
가디언이 입수한 문서에는 당시 통상산업부 공무원 DM 드러커의 발언이 실려 있다. 그는 “패러는 여왕의 재산이 불순하게 사람들에게 유출될 수 있다면서 재산 공개 자체가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정당화했다”고 전했다. 정부는 결국 이 법안에 ‘국가 지도부, 국영은행, 정부가 이용하는 법인에 대해선 재산 공개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면제 조항을 추가했다. 이 조항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건 왕실이었다. 영국 언론인 앤드루 모턴이 낸 책을 보면 이 법안이 의회에서 가결된 후인 1977년 여왕 소유로 추정되는 주식이 유령법인으로 이전됐다. 유령회사를 통한 여왕의 ‘비밀스러운 투자’는 2011년까지 이어졌다.
여왕이 손쉽게 입법 과정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불가사의한’ 영국의 입법 절차 탓이라고 가디언은 설명했다. 상·하원에서 통과한 법률은 여왕의 동의를 받는데, 이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법안이 의회에 회부되기 전 법안 내용이 왕실의 특권·사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면 각 부처 장관들이 여왕에게 사전 보고하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다.
토머스 애덤스 옥스퍼드대 헌법전문가는 “동의권 존재 자체가 여왕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는 것”이라면서 “로비스트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왕실은 가디언이 문의한 법안 개정 로비 여부엔 답변하지 않은 채 “여왕의 동의권은 군주가 가지는 순수한 공식 입법 절차”라는 해명만 내놓았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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