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연의 다시, 위안부 문제-⑥] '성노예 부정' 논문의 치명적 오류
논문 "계약금 지급구조에 관한 소스 없어"
한계 스스로 인정..인용자료 모두 공창제 관련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은 실증적으로, 역사적으로, 도덕적으로 비참할 정도의 결함이 있는 논문.”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한국역사학 교수의 평가)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로 규정한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소논문이 화제다. 논문을 작성한 존 마크 램자이어 하버드대 ‘미쓰비시 석좌 교수’(1970년 미쓰비시가 하버드대에 기부해 만든 명예교수직)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작성한 ‘태평양 전쟁 당시 성계약’(Contracting for sex in Pacific War) 소논문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국제학술지에 게재됐다는 이유로 산케이 신문 등 일본 우익세력이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근거자료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램자이어 논문은 가설부터 근거 사료까지 편향됐다. 논문은 위안소 제도의 기본적인 운영방식과 구조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않은 채 작성됐다.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은 “1) 전쟁이라는 위험 변수와 성계약이라는 불편한 행위로 인해 전시 성계약 구조는 높은 보상과 짧은 계약기간을 보장해야 했다”와 “2) 까다로운 계약조건으로 징집업자들은 조선인들을 속여 위안부로 동원했고, 일본군에서는 이같은 취업사기 행태를 단속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소 운영은 (1) 군 직영 위안소, (2) 군 인가 위안소(경영자를 두고 경영자를 군이 통제) (3) 군 위탁 위안소(운영을 기존 매춘업소에서 하는 형태) 형태로 이뤄졌다. 위안소 운영방식에 따라 그 징집 방식도 달랐다.
군위안소는 일본군의 보안 및 전쟁범죄 논란을 피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래서 형식상‘위안부 모집공고’와 계약구조를 빌려 ‘전시 매춘소’ 구조와 유사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일본의 단위부대가 자체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하면서 징집 과정에서 취업사기와 납치, 인신매매 등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동원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점은 일본 정부에서도 인지하고 있었음이 과거 사료를 통해 드러났다.
램자이어 교수가 위안부와 징집업자(모집업자)의 계약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다카오 후쿠시의 ‘매춘과 자본에 대한 연구’(1928)도 위안소 제도에 대한 구조가 아닌, 일본 내 공창제와 일본 내 위안소 구조 등을 서술한 논문이다.
램자이어 교수는 일본 내 위안소와 점령지 내 위안소, 식민지 내 위안소의 운영 및 징집 방식도 달랐다는 기본적인 정보도 파악하지 않은 채 논문을 작성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점령지의 일본군 위안소는 일본군이 직접 감독하고 통제하는 ‘직영 위안소’들이 눈에 띈다. 일본의 난징 주재 총영사관 회의록(1938년 4월)과 상하이 양자자이에 설치된 군 직영 위안소 ‘육군 오락소’와 관련한 ‘히가시(東) 병참사령부’의 위안소 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체 총수는 파악되지 않았다.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의 또다른 핵심 전제는 “징모업자(이른바 위안부 모집업체)와 위안부가 동일한 계약관계에서 위안부 계약을 체결했고, 징모업자들은 위안부들의 인센티브 제공을 위해 높은 보수를 약속했다”이다. 이 전제도 틀렸다. 일단 이를 뒷받침하는 계약서 자료가 전무하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1938년 자료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가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위안부들에게 매춘에 종사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는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의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의 조선총독부와 대만총독부는 위안부에 동원될 여성들을 적극 수배했다.
조선 위안부들은 일본 정부가 마련한 위안소의 기본적인 ‘계약 틀’에 해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일본이 위안소의 강제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1993년 고노담화 발표 전에 확인됐다. 1938년 3월 4일 ‘군 위안소 종업부 모집에 관한 건’ 공문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과정에서 징모업자들이 납치나 인신매매, 약취 유괴 등의 방법을 동원하니 일본 경찰에서 단속을 하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공문은 일본의 식민지인 대만과 조선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요시미 요시아키 츄오대 교수는 해당 공문을 찾아내 대만과 조선에는 통첩이 이뤄지지 않아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강제동원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일본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소제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발표할 때도 확인된 사실이다.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주체가 징모를 의뢰받은 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징모를 의뢰한 일본군과 육군성, 내무성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고(故) 문옥주 위안부 피해자가 받은 임금 역시 논문의 가설인 ‘위안부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와 짧은 계약기간을 보장받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되지 못한다. 당시 환율체계와 군 임금지급 체계를 보면 문 피해자는 많은 돈을 받은 것이 아닐 뿐더러 일반 화폐가 아닌 ‘군표’로 보상을 받았다. 더구나 문 피해자의 사례는 조선인 위안부의 사례로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본 기자가 서술한 자료와 사실관계는 이미 1993년에 확인이 된 것들이다. 현재 일본군 위안소 제도에 대한 연구는 공개된 사료들의 빈틈, 즉 위안소 제도의 형식상 구조 외에 식민지 위안소 운영실태와 위안부 피해자 규모, 구체적인 피해 실태를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나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은 기존 위안소 제도를 둘러싼 학술적 선행연구를 모두 무시한 채 일본의 가라유키상(일본 해외 원정 성매매)과 공창제로부터 위안소 제도를 ‘추론’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는 논문에서조차 “일본군 매춘부(prostitute)들이 돈을 어떻게 직접 받았는지, 돈이 어떻게 가족들에게 전달됐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핵심 전제부터 가설, 입증과정에까지 ‘과학적’ 혹은 ‘논리적’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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