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있는 방송노동자] ① "국장님이 프리랜서 해보셨어요?"

손가영 기자 2021. 2. 8. 17:1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청년 YTN 그래픽 디자이너, 첫 계약서에 "너는 근로계약과 무관" 독소조항… "카페 할인도 정규직만 해줘요"

[미디어오늘 손가영 기자]

“'을'은 본 계약이 근로계약과 무관하고, 따라서 4대 보험, 휴가, 휴일, 퇴직금, 업무상 재해 등 노동 관련법 상 일체 권한이 없는 것을 인식하며, 이와 관련해 '갑'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강진수(29·가명)씨는 3년 간 계약서를 보면서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YTN 담당 팀과 쓴 '업무 도급 계약서' 11조의 '계약의 본질' 조항이었다. 강씨는 계약서상 프리랜서였지만 실제론 자신이 프리랜서가 아님을 알았다. “매일 9시 출근해 18시 퇴근, YTN 사무실에서 YTN 집기를 쓰며 지시대로 일했는데 프리랜서인가요?” 강씨가 물었다.

그래픽 디자이너인 강씨는 지난해 말까지 YTN 사이언스국 편성기획팀에서 일했다. 2018년 8월 입사해 2년 반 가량 사이언스국에 필요한 이미지·영상 제작, CG 작업 등을 맡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방송국이 첫 직장이라니.” 입사 직후 부풀었던 기대는 깊은 실망으로 끝났다.“방송국 또한 사람을 함부로 쓰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결론이다.

▲ 강진수(가명)씨가 쓴 업무 도급 계약서 내용 중 일부. 디자인=안혜나 기자

일할 땐 직원처럼, 계약 해지 땐 프리랜서

강씨는 계약 종료 3일 전 퇴사를 통보받았다. 팀장이 조심스레 자신을 부르더니 '일자리 알아봐줄테니 이직이 어떠냐'고 말했다. '준비할 때 휴가도 줄 테니 면접보러 다녀라'고도 했다. 강씨는 당시 이 말의 진의를 몰랐다. 자신을 도와준다고 여기고 “도와주시면 감사하다”며 회사를 다니며 이직을 준비할 수 있겠다는 기대까지 했다.

이후 동료 직원에게 상황을 듣고 계약 해지 통보임을 깨달았다. 자신을 뺀 나머지 동료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상황이 공유되자 팀장으로부터 12월 28일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12월31일까지 일하는 걸로 하자.” 그래픽실엔 자신과 같은 프리랜서만 5명이 더 있었다. 강씨와 같은 해 입사한 1명을 빼면 나머지 넷은 각각 5·6·7·8년째 근속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해지 사유는 듣지 못했다. 강씨는 이유로 사이언스국장과의 불화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해 3월 업무 문제로 국장과 크게 다퉜고, 이후 9개월 간 국장이 자신의 인사도 받지 않을 정도로 불편한 관계가 유지됐다. 팀 내에서도 뒷말이 분분했다. '회사와 소송 중인 한 그래픽 디자이너를 이동시키려고 공석이 필요했다'는 추측도 있었다. 실제 해당 디자이너가 강씨가 나간 직후 그의 자리로 발령받아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YTN 측은 "전혀 사실 무근의 추측"이라고 밝혔다.

▲ 2018년 8월부터 2020년 12월 말까지 강씨가 만든 콘텐츠. 사진=YTN사이언스 인스타그램 갈무리.
▲ 지난 2월2일 강씨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열린 'CJB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1주기 추모주간 온라인 토론회 - 방송미디어 산업 '무늬만 프리랜서',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까?'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사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유튜브 캡쳐

'무늬만 프리랜서' 소신 발언 했다 갈등 일어

강씨는 '무늬만 프리랜서' 처우와 관련해 소신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지난해 3월 사이언스국장과 업무로 싸웠을 때다. 동료 디자이너의 휴가로 강씨가 그의 업무를 같이 봐주던 날이었다. 국장이 휴가 간 디자이너 제작물의 수정을 지시했다. 그런데 미리 인계받은 자료가 아니었고 그의 컴퓨터도 암호로 잠겨있어 작업할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

'너넨 왜 셰어를 안하니? 같이 일하는 건데 니 일 내 일 나눠서 하나?' 국장의 말에 강씨가 수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반박하면서 말싸움이 점점 커졌다. 국장은 지시대로 수정하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상황이 격해지며 급기야 강씨도 강하게 대꾸했다. “국장님, 저 프리랜서예요.”

“제 일 아닌데도 다른 (휴가 간 직원의) 일 대신 해드리고 있고요.” “프리랜서들 차별받죠. 4대 보험도 안 되고 임신하면 잘리고. 뭐가 있는데요?” “국장님이 프리랜서 해보셨어요? 안해보셨잖아요.” “막말로, 저는 제가 맡은 일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프리랜서는 그런 거잖아요.” 다툼 중에 강씨가 국장에게 한 말이다. 이후 강씨가 퇴사하기 전까지 국장은 강씨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YTN “해당 부서 직원과 강씨 간 프리랜서 계약”

강씨는 '업무 도급 계약서'를 해마다 썼다. 월급은 YTN에서 나왔지만 계약서의 '갑'은 편성기획팀장 개인이었다. “SNS 온라인 콘텐츠 편집 및 디자인 업무 및 관련 부대 업무”가 그가 맡은 도급 업무다. 처음엔 디자인 업무로 계약했는데 입사 직후부터 추가 업무가 늘었다. 인스타그램 콘텐츠 제작·관리를 맡다가 계약서에 'SNS 콘텐츠 편집'이 추가됐다.

일의 종류는 다양했다. YTN 사이언스 유튜브 채널 영상의 썸네일(Thumbnail)을 거의 매일 만들었고 5분 가량 영상물도 제작했다. 강씨 입사 즈음에 채널 인스타그램 계정도 개설되면서 인스타그램 콘텐츠 제작·관리도 시작했다. 처음엔 카드뉴스를 만들었고, 이후 영상을 주로 제작했다. 오전 7시, 저녁 6시에 맞춰 콘텐츠를 올리는 일도 디자이너들이 했다. 관련해 직접 만화도 그렸다. 만화 캐릭터가 과학 기사를 쉽게 설명해주는 취지의 콘텐츠로 인스타그램·유튜브 용을 다 만들었다. 그 외 사이언스국 행사 현수막이나 공모전 포스터, 각종 배너도 만들었다.

일은 편성기획팀에서 지시했다. 강씨는 매주 월~금요일 오전 9시 YTN 6층 사무실에 출근해 저녁 6시 퇴근했다. 다른 동료가 휴가일 땐 업무도 공유했고, 사이언스국 상황에 따라 업무 종류도 점차 늘었다. 휴가는 한 달에 하루씩 받았고 여름에만 특별히 '5일 휴가'가 나왔다. 강씨는 “진짜 프리랜서처럼 출·퇴근 하지 않고 관리자 감독에서도 자유로워 결과물만 넘기면 되는 일자리가 결코 아니었다”고 말했다.

YTN 사이언스국 편성기획팀 관계자는 8일 “본 계약은 사이언스국 소속 팀의 직원과 강씨가 체결한 부·팀과 개인 간 계약으로, 강씨는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라며 “YTN은 계약 당사자가 아니기에 사업주로서의 의무나 고용 연장 의무는 없다”고 알려왔다. 급여에 대해서도 “부서마다 융통성있게 쓸 수 있도록 할당된 예산이 있고 여기서 지출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강씨의 계약 해지 사유 추측엔 “관련 국장과의 다툼이나 타 부서 인사로 인한 해지가 아닌 계약기간이 만료된 상황”이라고 밝혔다. 또 “회사는 계약된 내용과 다른 업무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다. 계약에 나오는 대로 업무 수행 여부만 체크한다”고 말했다.

▲ 강씨는 짧은 만화를 통해 과학 정보를 전달하는 유튜브·인스타그램 콘텐츠도 제작했다. 사진=YTN사이언스 인스타그램 갈무리

카페 할인 마저 '정직원 출입증'만

강씨는 우스갯소리로 “직접 정규직 출입증을 만든 적도 있다”고 말했다. 파견노동자나 프리랜서 같은 비정규 인력은 '방문증'을 받았다. 출입증엔 직원 얼굴 사진이 실려있고 방문증엔 없었다. 강씨는 재미 삼아 사진을 제작해 방문증에 끼워 출입증처럼 만들어 다녔다. 이를 본 다른 동료들이 자기도 만들어달라고 해 만들어주기도 했다. 강씨는 “참 웃긴 게 주변 카페 음료 할인도 '정직원 출입증'에만 해주더라. 직원처럼 일해도 비정규직 방문증은 안된다”고 말했다.

YTN은 그의 첫 직장이다. 26살, 산업디자인과 졸업 직후 학과 단체대화방에 올라온 '알바 구인' 글을 보고 지원해 일을 시작했다. 2018년 첫 월급은 170만원. 다음 해 175만원으로 올랐고, 후임 직원이 들어온 후엔 190만원으로 인상돼 2020년까지 매달 190만원을 받았다. 이 중 월세로만 65만원이 나갔다. 강씨는 “마음 걱정끼치기 싫어 어머니껜 퇴사했다는 말을 아직 못했다”며 눈물도 보였다.

강씨는 무늬만 프리랜서였기에 빼앗겼던 권리를 찾는 싸움을 시작할 거라고 말했다. 그는 퇴직금 지급 진정과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준비 중이다. 모두 자신의 노동자성을 확인받는 권리 구제 방법이다. 강씨는 “다른 이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길 바란다”고 취지를 밝혔다.

[기사 수정 : 8일 22시 10분 YTN 반론 추가 반영]

[미디어오늘 바로가기][미디어오늘 페이스북]
미디어오늘을 지지·격려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Copyrights ⓒ 미디어오늘.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