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민주화 넘어 새로운 서사, 80년생이 만들어보자"
시작은 수다였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문제가 결국 다 심오한 정치 사회 이슈 아니든가. 부동산, 주식, 노동 시장에서 시작된 대화는 한국 경제와 저출산, 공정, 불평등까지 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열변을 토하며 분노할 때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안에서도 이토록 많은 솔루션이 쏟아지는데, 한국 사회의 문제들은 왜 해결될 기미 없이 제자리를 맴도나.” 80년대생 6명이 기존 사회 비평을 뛰어넘어보자며 ‘추월의 시대’(메디치미디어)를 쓴 건 좌도 우도 꽉 막힌 한국 사회가 “너무 답답해서”였다. 이들은 책에서 산업화와 민주화, ‘친일’과 ‘좌빨’이란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 한국 사회를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고 목놓아 외친다. 한국 사회에 아직 할말이 많아 보였던 그들을 1일 만났다. 국회 보좌관 출신으로 새로운소통사회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하헌기,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양승훈, 언론사와 기업을 두루 거친 작가 백승호가 대표로 나왔다.
일단 진단부터 들어가 보자. 숱한 문제들은 왜 해결되지 않는가. 아니 기성 정치권은 왜 제대로 해결 못하나. 세 사람은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데만 기를 쓰는 정치 내전에서 야기된 문화지체”가 궁극적 원인이라 진단했다. 이들이 보기에 한국은 더 이상 선진국을 따라 잡으려 애써야 하는 ‘추격 국가’가 아니다. 선진국 반열의 경제 규모를 달성했고, 피 흘리지 않고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민주 혁명에도 성공했다. “산업화, 민주화 세력이 일궈놓은 부정할 수 없는 모두의 공”(양승훈)이다.
그러나 정작 두 세력은 상대 진영의 성취를 부정하고, 깔아뭉개는 데만 애를 쓴다. 그래야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데 유리하니까. 한국 사회에 팽배한 비관론은 극심한 대립을 부추기는 폄하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문제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낡은 프레임만으론 선진국형 문제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오늘을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백승호)는 거다. 누구보다 정치권의 생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여의도 출신은 한마디 더 보탰다. “보수와 진보 공히 핵심 지지층만 챙기면서, 양극화된 과거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여의도 정치권이 지적으로 게으른 게 가장 큰 문제죠.”(하헌기)
극단만 좇는 정치권의 도식적인 해법은 평범한 ‘80의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 당장 현 정부가 내세운 노동문제의 해법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 봐도 그렇다. 진보 정권에겐 너무 익숙한 레퍼토리지만 복잡다단해진 노동시장을 풀기엔 역부족이다. “인국공(인천국제공항) 사태 때 공정 문제가 불거졌지만, 그 공정은 정규직 입사를 준비하는 취준생에게만 해당됐을 뿐, 나머지 80%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죠.”(양승훈) “억대 연봉의 비정규직 개발자들은 정작 정규직을 원하지 않아요. 하위 비정규직들 역시 정규직이 아니라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갈지 모르는 AI 로봇에 위협받는 상황입니다.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 노동자 문제는 또 어떻게 풀건가요.”(백승호) 결국 선진국형 문제를 풀기 위해선,새로운 문제 설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추격이 아닌 추월의 시대, 80들의 삶을 고민하는 데 80년대생은 꽤나 유리하다.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서 자란 마지막 세대인 동시에 선진국 대한민국을 겪은 첫 세대로,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실을 처음으로 모두 누린 만큼, 객관화, 유연성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는 자평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산업화, 민주화 세대에 전격적인 퇴장을 요구하는 건 결코 아니다. 그저 “달라진 현실을 몸소 헤쳐나가는 후속세대들의 목소리를 좀 들어달라”는 당부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80년대생들이 산업화 민주화 세력간의 화해도 주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 책이 끝은 아니다. 비판을 넘어 대안을 만들기 위해 일종의 싱크탱크(새로운소통사회연구소)도 만들었다. 우선 청년세대 대상 꾸준한 설문조사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의식 변화를 추적해 나갈 생각이다. 2017년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마크롱과 앙 마르슈(청년운동이 모태가 된 정당)가 실시한 풀뿌리 정책 설문조사인 ‘그랑드 마르슈’(Grande Marche)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프랑스 전역을 집집마다 방문해 프랑스 변화 방향에 대해 묻고 이를 통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만들어 나갔던 방식이다. “기성정치권이 재단하는 여론과 진짜 여론의 미스매칭을 해소해나가려는 노력”(하헌기)이 될 수 있다.
열등감을 넘어 자긍심으로 한국을 바라보자는 주장을 두고 누군가는 ‘국뽕’이라고 폄하한다. 그래서 '헬조선'이 아니란 거냐는 반발도 들려온다. 이들은 둘 다 맞지만, 거기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한쪽의 입장만 봐선 안 된다. 한국 사회가 도약하기 위해선, 두 가지를 엮어서 다음의 시각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양승훈) 그래서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선 다음의 서사는 무엇일까. “80을 위한 정치 만들기”(하헌기), “코리아스탠더드 세우기”(백승훈)란 답이 돌아왔다. 비단 80년대생들만의 숙제는 아닐 테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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