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사법농단 판사 탄핵이냐고? [뉴스 깊이보기]
[경향신문]
인터넷 커뮤니티에 연예인 모욕글을 올렸을 때,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때, 배우자와 이혼하려는데 합의가 안 될 때. 당신이 재판의 당사자가 되어 법원을 방문할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이다. 살면서 재판을 경험하는 시민이 흔하진 않지만 이런 사례들을 보면 재판은 그리 멀리 있지도 않다.
재판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판사다. 그런데 재판의 당사자인 당신 몰래 판사가 법원의 상급자에게 사건에 관해 어떤 말을 들었다면 어떨까? 그 상급자의 말을 들은 뒤 판사가 판결 내용을 수정했다면 어떨까?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국회에서 헌정 사상 최초의 법관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4일, 곳곳에서 날선 단어들이 쏟아졌다. 국민의힘은 사법농단 연루 법관 탄핵을 두고 “사법부가 치욕을 당했다”, “사법부 난도질”이라고 했다. 탄핵소추 대상인 임성근 판사가 김명수 대법원장이 탄핵을 이유로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고 말한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거짓말’ 논란이 불거졌다.
정치 공방과 진영 싸움에서 벗어나 사법농단 사건의 본질로 돌아가 봤다. 사법농단은 대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가 일선 재판에 개입해 법관 독립을 침해했다는 의혹이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한다. 법관 독립은 여당에 좋고, 야당에 나쁜 게 아니다.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재판의 독립은 재판받는 국민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립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헌법상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라면 공개된 법정에서 나와 직접 눈을 마주치고, 나의 호소를 직접 귀로 듣고, 내가 제출한 증거를 직접 읽어본 바로 그 판사가 법정에서 적법절차에 의해서 판결한 그 판결, 독립되고 공정한 판결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탄핵소추 발의 제안설명 중 한 대목이다.
■권위주의 역사 속 만들어진 ‘사법부 독립신화’
1981년 이영섭 전 대법원장은 퇴임하면서 “지난날은 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사법부는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이지만, 한국 헌정사에서 사법부는 권위주의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권력 입맛에 맞지 않는 판사에겐 노골적인 보복인사가 자행됐고, 판사들은 시국사건에서 국가의 편을 드는 판결을 했다. 정권 압력에 소신껏 거부한 판사도 있었지만 충실한 추종자 노릇을 한 판사도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그동안 한국에서 사법권 독립은 정치권력 등 ‘외부’로부터 사법부를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2017년 퇴임하면서 외부의 개입과 사법부 독립을 언급했다. “오랜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룩한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뤄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사법부 독립은 사법부에 대해 어떠한 비판과 견제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활용됐다. 책임에서도 벗어났다. 학자들은 이를 사법부 독립의 ‘신화화’, ‘절대화’라고 지칭했다. “사법부 독립은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확보해야 할 헌법적 가치로 신화화됐다”, “사법의 독립성에 대한 신화적 환상은 역설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사법개혁 논의를 답보 상태에 머물게 해왔다”고 했다. 사법권도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헌법 제1조 국민주권주의)인데 말이다. 임성근 판사 탄핵이 사법부 독립 침해라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 있다.
동시에 법원 ‘내부’로부터의 사법권 독립, 법관 개인의 독립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법관 인사권 등이 대법원장 1인에게 집중돼있는 수직적 구조에서 판사들이 윗선 눈치를 보는 ‘법관의 관료화’ 현상이 나타났다. 2017년 3월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법관 500명 대상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10명 중 9명은 ‘법원장 등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했을 때 불이익을 우려한다’고 답했다. 기타 의견 중에는 ‘직간접적인 사건 처리 관여’도 포함됐다.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몰아주기 배당 논란으로 사법행정권 남용 문제가 불거졌지만 신 전 대법관은 6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고, 법관의 관료화가 개선된 것은 없었다. 이후 ‘양승태 법원행정처’의 사법농단 의혹이 터졌다.
■‘선배 조언’이라 괜찮다는 그들
임 판사에 대한 탄핵소추 사유는 아래(1심 판결에서 인정된 사실관계를 요약)와 같다. 2015년 그가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일 때 3개 사건의 재판에 개입한 행위가 문제다.
①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관련 칼럼을 썼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가토 타쓰야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에 대한 재판 개입
-담당 재판장을 형사수석부장 사무실로 불러 ‘여성 대통령이 모처에서 다른 남성을 만났다는 부분은 아주 치명적인 부분이고 국민들 관심도 많은 사건이니 명확히 정리해주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함.
-재판장을 형사수석부장 사무실로 불러 ‘타쓰야에게 무죄 판결을 선고하더라도 무죄라고 단순하게 끝내지 말아라. 비록 무죄이기는 하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함.
-재판장에게 판결 선고 때 법정에서 낭독할 구술본의 말미 부분 파일을 받아 자신이 수정한 뒤 전달함.
-재판장에게 ‘선처를 요청한다는 내용의 외교부 공문이 올 것이니 법정에서 타쓰야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말함.
②야구선수들의 도박 사건에 대한 재판 개입
-담당 판사가 공판회부 결정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당 판사를 불러 ‘다른 판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말함.
③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들의 체포치상 사건에 대한 재판 개입
-판결 선고 후 담당 재판장에게 ‘(판결 중) 양형의 이유 부분에 논란이 있을만한 표현들이 있는 것 같다. 톤을 다운하는 것이 어떨지 검토해보라’고 말함.
임 판사는 ‘외부’ 공격을 막기 위해 사법행정권자이자 선배 법관으로서 재판부에 조언한 것이라고 자신의 형사재판에서 주장해왔다. 그는 1심 최후진술에서 “판사가 영장을 발부·기각하거나 무죄 판결을 선고한 경우 검찰에서 이를 비난하고,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다는 이유로 언론·정치권·시민단체에서 판사 개인을 공격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며 “형사법관들이 소신껏 재판하는 데 (제가) 방패막이가 되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임 판사의 직책인 ‘수석부장’이 핵심이다.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은 각 법원의 법원장에게 위임되는데, 수석부장은 법원장을 보좌하면서 사건배당·사무분담(재판부 배정) 등 사법행정 업무를 한다. 특히 법관의 근무평정에 관여한다. 판사에게 상중하 점수를 매기는 평정은 선발성 인사, 해외연수 등에 영향을 미쳤다. 일각에선 ‘일개 판사’에 불과한 임 판사 탄핵이 지나치다고 하지만, 당시 임 판사는 20년 이상의 법관 경력을 갖고 있었고 직급은 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급)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형사사건이 몰리는 곳이다. 수석부장의 지위에서 일선 판사에게 재판에 관해 조언하는 게 허용되는지, 재판권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가 쟁점이 된다.
타쓰야 사건의 재판장이었던 이동근 판사는 2019년 9월 임 판사의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임 판사 말이 ‘지시’나 ‘강요’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다만 임 판사 사건을 심리하던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 송인권 재판장이 “사법행정권한상 상급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불러서 조언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느냐”고 질문하자 이 판사는 “자주 있었다고는 말 못하겠다”고 답변했다. 독일법관법은 법관 독립을 침해하는 방식의 조언은 금지한다. “조언이라는 직무감독 수단을 통해 재판에서의 법관의 결정의 자유를 제약하거나, 법관에게 일정한 시간 내에 재판을 종료하도록 심리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 사건에서 파면 결정의 요건으로 ‘중대한 법 위반’을 들었지만, 법관 탄핵 사건에서는 그보다 낮은 기준으로도 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8년 9월 열린 법관 탄핵 토론회에서 “최고 헌법기관으로 정부의 유일한 수반이자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는 점에서 최고성·유일성·민주적 정당성을 가지는 대통령과 달리 법관은 복수의 헌법기관 중의 하나이며 그가 탄핵된다고 해서 사법 또는 재판의 업무가 중대한 차질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중대성 여부의 판단은 대통령 탄핵보다 법관 탄핵에서 상당히 완화된 형태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애초에 국회의 탄핵소추 요건도 다르다. 대통령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발의에 3분의2 이상 찬성이지만, 법관은 3분의1 이상 발의에 과반수 찬성이다.
■법관 독립 침해에 대한 공적 판단 나올까
탄핵 제도는 기본적으로는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고위공직자를 ‘공직에서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헌재 심판에서는 2월말 임기 만료로 법복을 벗는 임 판사에 대한 파면 결정이 가능하느냐부터 실익이 있느냐까지 논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심리가 길어지면 헌재는 소의 이익이 없다고 봐 각하 결정을 할 수 있다.
5년간 공무원이 될 수 없고 퇴직급여가 삭감되는 등 파면 결정의 효과가 분명히 있고, 사인이 아니라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탄핵심판의 특징을 감안해 단순히 각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헌재는 각하 결정을 하면서 예외적으로 본안 판단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결국 법관 독립의 의미를 세우는 선례가 나올지는 헌재 판단에 달려있다. 법관 탄핵의 실익을 법조인들에게 물어봤다.
“법관 독립의 목적은 국민의 공정하게 재판 받을 권리입니다. (사법농단은) 그 권리를 침해한 것이고,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사법권 침해입니다. 탄핵은 사법권 독립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요. 사법부 개혁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여당이 주도해 탄핵 이야기를 하니까 ‘사법부 길들이기’ 같은 의심이 생기는데요. 우리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때그때 정치적 상황과 상관없이 나라의 근본적인 제도를 세우는 것은 궁극적인 국민의 이익입니다. 제도를 확립하는 것, 이것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사법권 독립을 지켜야 야당도 좋습니다. 여·야할 것 없이 법관이 공정하게 재판해야 좋은 거예요.”(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독일 나치 시대 때 법관들이 악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법 왜곡을 일삼았잖아요. 나치 체제가 종식되고 서독 정부가 구성될 때 현행 독일 헌법 제정을 둘러싸고 논의하면서 나치 시대 때의 법관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법권에 대해 권력분립 원리에 따라 의회 통제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법관 탄핵 제도를 헌법에 삽입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법권 독립을 이야기하면서 책임있는 재판과 사법권의 역할을 기대했는데, 그동안 확인한 것은 사법농단과, 사법권이 정치권력에 결탁해서 내놓은 각종 오심들이었단 말이예요. 사법권을 제대로 바로 잡기 위해 권력분립에 의한 통제가 필요한 것이죠. 사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은 아니거든요.”(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결국에는 재발되잖아요. 신영철 전 대법관 사태 때 유야무야 넘어간 게 10년이 지나지 않아 (사법농단 사건이) 터진 거예요. 그것을 방지하자는 실익이 가장 커요. (…) 외부기관이 이 행위에 대해 헌법적 관점에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겠다, 그것에 대해서 법원은 당사자로서 겸허하게 수용하고 성찰해야 된다, 이거예요.”(한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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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독일법관법에 관한 연구-직업법관의 신분과 법적 지위를 중심으로(사법정책연구원), 법관 탄핵의 요건과 절차-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하여(윤정인·김선택), 사법부의 독립성과 책임성: 미국의 법관징계제도를 중심으로(문재완), 사법권 독립에 대한 비판적 검토: 독립과 책임의 조화를 중심으로(최선), 헌법철학적 가치로서의 사법의 책무성(최유경), 법관에게 책임을 묻는다-사법농단 관여 법관 탄핵의 의의와 필요성 토론회 자료집(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 등.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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