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넘어가면 인생 파멸".. 김명수 사태에 가인 김병로 재조명

이태훈기자 2021. 2. 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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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4일 오후 김명수 대법원장이 퇴근하고 있다(사진). 2017년 법관 재직 당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처음 제기한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탄핵소추안 투표를 마친 뒤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 등과 인사하고 있다. 국회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사진공동취재단
‘법관 탄핵 발언’을 한 김명수 대법원장의 정치권 눈치 보기와 거짓말에 대한 법관들의 내부 비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초대 대법원장으로 이승만 독재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지킨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의 강직한 삶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법부의 초석으로 추앙받는 가인의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법관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스승’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인은 대법원장 재직 시 법관들에게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인연 등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유혹하며, 정궤(正軌)에서 일탈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라며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힘이 모자라서 이런 유혹들에 넘어가게 된다면 인생으로서의 파멸을 의미할 뿐 아니라 법관의 존엄성으로 비추어 보아도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판사들이 권력의 압력과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개인적으로 인생이 파멸하는 것이고 법관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 부끄러운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도 김명수 대법원장은 판사들을 순치시키려는 권력의 시도를 결연히 막아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사법부 수장이 여권의 법관 탄핵에 협조하는 행태를 보임으로서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 제의를 거절해 이 대통령과 관계가 불편했던 가인은 반민족특별법에 반대한 이 대통령을 공개 비판하는 등 이승만 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다. 1948년 8월 5일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가인은 1957년 12월 16일 정년퇴임할 때까지 이승만 정권이 사법부 독립을 위협할 때마다 “민주주의를 파멸시킬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1952년에는 이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에 반대하던 서민호 의원이 총격 사건으로 구속되자 안윤출 판사가 구속집행정지를 결정해 서 의원을 석방하는 일이 있었다. 이 대통령이 석방 결정에 불만을 나타내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시오”라고 말해 정권의 사법부 장악 시도를 막아냈다. 이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에게 “요즘 헌법(김병로) 잘 계시느냐”며 김 대법원장에 대한 못마땅한 심경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법부에 대해 “법관들이 세계에 없는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거나 “재판관들의 무제한한 자유권은 대단히 위험하다”며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럴 때마다 “폭군적인 집권자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사법부 독립뿐이다”라며 흔들리지 않았다.

1888년 1월 26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가인 선생은 191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다. 1919년부터는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맞서 싸우는 독립지사들을 위해 무료변론 활동을 했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그가 변론을 맡은 독립운동 사건만 100건이 넘는다.

가인은 1923년 의열단 사건 공판의 변호를 맡아 “국가심리로 보면 죄라 하겠으나 민족심리로 보면 죄가 아니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오. 만약 현재 상태를 바꾸어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의 상태에 있다면 일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변론한 내용이 당시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공사(公私) 구분이 엄격했던 가인은 6·25전쟁 때 부산 피난길에 오르면서 “정부가 피난 가는 마당에 집사람을 관용차에 태우고 다닐 수 없다”며 부인을 전남 담양의 친정집으로 내려 보냈다. 부인은 그곳에서 공비에게 학살당했다.

가인은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 사법부의 독립을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지켜낸 법조 윤리의 화신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토대는 가인이 평생 실천한 청렴함과 강직함이었다. 가인은 대법원장 재직 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변호사 개업을 하려는 판사를 만류하면서 “나도 죽으로 살고 있어요. 서로 죽을 먹어가면서 일해 봅시다”라고 말한 일화도 전해진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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