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이 감당해야 할 낯선 '제3의 길'
정의당이 김종철 당 대표 성추행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는 낯선 장면들이 있다. 성추행의 구체적 행위가 알려지지 않았고, ‘성추행이냐 아니냐’ 하는 흔한 진실 공방도 찾아볼 수 없다. 피해 사실을 공개했으나 형사고소는 택하지 않았다. 그동안 미투 운동을 포함한 권력형 성범죄 사건의 경우 사법절차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길게는 2~3년이 걸리는데 그동안 피해자가 2차 가해에 노출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정의당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피해 사실을 공개하되, 공동체(이 맥락에서는 정당이라는 공동체) 차원의 해결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정의당 젠더인권본부에 장혜영 의원이 피해 사실을 알린 건 1월18일이다. 일주일간 배복주 부대표(젠더인권본부장)가 비공개 조사를 진행했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현직 정치인이어서 2차 가해가 쏟아질 것을 우려했다. 1월25일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대표단은 김종철 당 대표를 중앙당기위원회에 제소하기로 결정하고, 당규에 따라 직위해제했다. 김종철 대표는 “피해자가 원치 않고 전혀 동의도 없는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행함으로써, 명백한 성추행의 가해를 저질렀다”라고 사과했다. 정의당은 젠더 관련 조직문화를 밑바닥부터 총체적으로 점검하겠다고 선언했다.
성폭력 사건을 수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특히 익명으로 보호받아야 할 성추행 피해자가 동시에 가장 공적인 선출직 정치가일 때, 상충되는 두 요구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나. 상황은 간단치가 않았다. 선택지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아예 처음부터 성추행 사건을 비공개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장혜영 의원은 비공개 대신 공개 문제 제기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썼다. “이것이 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자, 제가 깊이 사랑하며 몸담고 있는 정의당과 우리 사회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피해자는 공개를 원했고, 정의당은 그를 존중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익숙한 형사고소와 낯선 ‘공동체적 해결’ 사이의 선택이었다.
“당 입장에서는 사실 경찰에 고소하는 방법이 제일 편하죠. 각이 딱딱 나오잖아. 경찰에 맡기면 당은 책임을 덜게 되니까요.” 1월27일 배복주 부대표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동체적 해결은 조직 차원에서 감당할 부담이 늘어나는 선택이다. 성폭력 사건을 다룰 원칙을 만들고 당원들을 설득해가야 한다. 배 부대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라고 표현했다. 정의당은 피해자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고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우선 고려하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 문제 해결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 외에 ‘가해자에 대한 무관용’ ‘2차 가해를 엄격히 차단’ ‘성인지 감수성을 견지한 공동체적 해결 방식’ 등의 원칙도 적용했다.
정의당은 왜 사법절차라는 결정을 피해갔을까. 장혜영 의원은 페이스북에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면서 피해자다움에 갇히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다. 1월25일 페이스북에 그는 “정의당이 무관용의 태도로 사건을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김종철 대표가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제가 왜 원치도 않는 제3자의 고발을 통해…”
형사절차에서는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주체가 되기 어렵다. 국가의 수사·기소 기관과 피의자가 다투는 절차다. 여기서 피해자의 회복은 본질이 아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사가 무시되거나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여지가 생긴다. 배 부대표는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결정한다”라고 설명했다. 사건을 조용히 처리할지, 형사고소를 할지, 또 그로 인한 문제점은 무엇인지 충분히 정보를 제공받은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해결 방식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피해자 중심주의 원리라는 입장이다.
문제는 현행법상 성범죄가 비친고죄라는 점이다. 피해자와 무관한 제3자가 고발할 수 있다. 1월26일 한 보수단체는 “사퇴와 직위해제로 끝날 일이 아닌 만큼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라며 김종철 전 대표를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강제추행 혐의로 고발했다. 장혜영 의원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방해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제가 왜 원치도 않은 제3자의 고발을 통해 다시금 피해를 지난하게 상기하고 설명하며 그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2차 가해를 감당해야 합니까?”
성범죄 친고죄가 폐지된 것은 2013년이다. 이번처럼 ‘무관한 제3자’가 마음대로 고발할 길을 열어주겠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친고죄 시절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압박하여 고소를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거나 합의를 종용하는 등 2차 가해를 하는 사례가 잦았다. 성범죄 친고죄를 폐지한 것은 사건처리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였다. 배복주 부대표는 “이미 피해자가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인데, 제3자가 피해자를 법정에 세운다면 돕는 게 아니라 고통을 주는 거다”라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을 사법절차로 무조건 환원하면 오히려 피해자의 다양한 요구를 무시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의 공동체적 해결 방식을 ‘공적 절차’로 볼 수 있나 하는 질문도 제기된다. 성추행은 국가의 형법상 엄연한 불법행위인데, 이를 ‘공동체 내부’에서 해결한다는 것이 법치주의와 충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당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번 사건을 진보정치의 도덕적 파산으로 보는 이들은 탈당을 선언하기도 했다. 한 40대 정의당 관계자는 “더 이상 과거의 진보가 현재의 진보와 시대 요구를 못 따라간다. 세대가 교체되어야 하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2004년부터 진보정당에서 활동해온 곽수진씨(36)는 생각이 다르다. 사건 이후 당원들끼리 성폭력은 왜 발생하는지, 특정 성별, 특정 나이대가 정치를 독점하는 게 왜 문제인지 등등 논의가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성희롱, 성추행을 당하고 공론화를 고민해본 경험이 있다. 장혜영 의원의 문제 제기로 인해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열렸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공동체적 해결 방식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런 질문들이 남아 있다. 당원들은 자기 손으로 뽑은 당 대표가 왜 징계를 받았는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는가? 권력형 성범죄는 어떤 배경에서 발생하는가? 성추행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묻는 것은 2차 가해인가? 공동체적 해결이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며 공통의 서사와 규칙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란 것이 정의당의 이야기다.
정의당이 선택한 낯선 길 앞에 험난한 도전들이 놓여 있다. 정의당은 공동체적 해법을 모색하는 일이 당 차원에서 책임지고 신뢰를 되찾는 길이라고 본다. 배복주 부대표는 “이 과정을 통해 얼마나 진통이 생기겠나. 진통을 겪으면서 공동체가 함께 학습하게 되고 회복 과정을 거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낯선 ‘제3의 길’이 옳은 선택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이 길고 고통스러울 것으로 보이는 과정을 정의당이 감당해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
김영화 기자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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