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이 '동지'였던 노무현과 문재인에 보낸 글

장슬기 기자 2021. 2. 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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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세월 동지, 짧은시간 적" "우린 어디서부터 갈라졌나" 부산서 34일만에 청와대 걸어온 김진숙 옛글 재조명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전두환 정권에서 해고된 김진숙은 왜 36년째 해고자인가. 그 대답을 듣고 싶어 34일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약속들이 왜 지켜지지 않는지 묻고 싶어 한발 한발 천리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36년간 나는 유령이었습니다. 자본에게 권력에게만 보이지 않는 유령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내가 보이십니까. 함께 싸워왔던 당신이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해고자인 내가 보이십니까.”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부산에서 걸어서 청와대 앞까지 온 지난 7일 한 말이다. 지난 5일 '김진숙 복직'을 주장하며 46일째 단식하던 송경동 시인이 국회 경호원들에게 끌려나오다 실신해 병원에 실려갔고, 지난 6일 김진숙 위원의 희망뚜벅이가 서울에 도착하면서 주말 사이 그가 과거 썼던 글이 다시 회자됐다. 인권변호사 출신 변호사들이 인권을 외면한 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심정, 민주당 계열 대통령의 반노동 행보 등을 잘 보여주는 글이었다.

▲ 복직 기원 희망뚜벅 행진 마지막 날인 7일 오후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서울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 도착하여 관계자들 및 48일째 단식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서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다음달인 6월 김진숙 위원이 쓴 “노무현 '동지'를 꿈꾸며”란 제목의 글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사망 소식을 듣고 부산역에 조문하러 갔다가 방명록에 몇 줄을 남겼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이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1990년 김 위원이 처음 징역을 살 때 재판이 아닌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주려고' 왔던 노무현 변호사에 대한 고마움을 언급하면서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노 변호사가 정치권으로 갔고 김 위원은 그때 직감적으로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 위원은 왜 “이회창이 당선된 거보다 노무현이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 더 힘”이 드는지,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3년 한진중공업에서 두명의 동지를 잃은 김 위원에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는 말이 가혹한지 말했다.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고 다들 침이 마르게 말했지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김 위원 같은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 됐고, 대드는 노동자만 잘리던 군사독재 시절과 달리 남녀노소가 다 잘리는 시대가 됐다고도 했다.

김 위원은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라며 개인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각기 다른 마음을 함께 적었다.

이후 크레인에 올라간 김 위원을 지지하기 위한 2010년 희망버스가 있었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끝낸 촛불집회가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문재인 정권에서도 김 위원은 복직하지 못했다. 지난해 10월20일 김 위원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띄웠다.

김 위원은 편지에서 “86년 최루탄이 소낙비처럼 퍼붓던 거리 때도 우린 함께 있었고, 91년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라는 투쟁의 대오에도 우린 함께였고,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오위원의 자리에도 같이 있었던 우린. 어디서부터 갈라져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 걸까요”라며 노 전 대통령에게 던졌던 비슷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김 위원은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면, 가장 많은 피를 뿌린 건 노동자들인데, 그 나무의 열매는 누가 따먹고, 그 나무의 그늘에선 누가 쉬고 있는 걸까요”라며 “그저께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저의 복직을 응원하겠다고 오셨습니다. 우린 언제까지나 약자가 약자를 응원하고, 슬픔이 슬픔을 위로해야 합니까”라고 했다.

이어 “그 옛날 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던 문재인 대통령님 저의 해고는 여전히 부당합니다”라며 “옛 동지가 간절하게 묻습니다”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 참여정부 시절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과 노무현 대통령(오른쪽). 사진=연합뉴스

[관련기사 : 문재인 정부 청와대 앞 풍경의 '역설']

다음은 김 위원의 두 글 전문이다.

노무현 '동지'를 꿈꾸며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었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창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현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전 4번을 찍었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다음 생에선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김진숙 동지가 문재인 대통령에 전하는 글

우린 어디서부터 갈라진 걸까요

86년 최루탄이 소낙비처럼 퍼붓던 거리 때도 우린 함께 있었고,

91년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라는 투쟁의 대오에도 우린 함께였고,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오위원의 자리에도 같이 있었던 우린.

어디서부터 갈라져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 걸까요.

한 사람은 열사라는 낯선 이름을 묘비에 새긴 채 무덤 속에,

또 한 사람은 35년을 해고노동자로, 또 한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극과 극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 운명이었을까요, 세월이었을까요.

배수진조차 없었던 노동의 자리, 기름기 하나 없는 몸뚱아리가 최후의 보루였던

김주익의 17주기가 며칠 전 지났습니다.

노동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데 죽어서야 존재가 드러나는 노동자들.

최대한 어릴 때 죽어야, 최대한 처참하게 죽어야, 최대한 많이 죽어야 뉴스가 되고

뉴스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누군가 또 죽습니다.

실습생이라는 노동자의 이름조차 지니지 못한 아이들이 죽고, 하루 스무시간의 노동 끝에 '나 너무 힘들어요'라는 카톡을 유언으로 남긴 택배 노동자가 죽고, 코로나 이후 20대 여성들이 가장 많이 죽고, 대우버스노동자가 짤리고, 아시아나케이오, 현중하청(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들이 짤리고, 짤린 비정규직들은 수년 째 거리에 있습니다.

연애편지 한 통 써보지 못하고 저의 20대는 갔고, 대공분실에서, 경찰청 강력계에서, 감옥의 징벌방에서, 짓이겨진 몸뚱아리 붙잡고 울어줄 사람 하나 없는 청춘이 가고, 항소이유서와 최후진술서, 어제 저녁을 같이 먹었던 사람의 추모사를 쓰며 세월이 다 갔습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면, 가장 많은 피를 뿌린 건 노동자들인데,

그 나무의 열매는 누가 따먹고, 그 나무의 그늘에선 누가 쉬고 있는 걸까요.

그저께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저의 복직을 응원하겠다고 오셨습니다.

우린 언제까지나 약자가 약자를 응원하고, 슬픔이 슬픔을 위로해야 합니까.

그 옛날 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던 문재인 대통령님

저의 해고는 여전히 부당합니다.

옛 동지가 간절하게 묻습니다.

2020. 10. 20.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자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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