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세상과 여성의 삶을 변화시킨다[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2. 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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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환상의 복식조’ 첫 라운드는 페미니즘 지고의 주제인 여성성과 본질론을 화두로 설정, 이에 부합하는 작가로 윤석남(82)과 장파(40)를 초대했다. 한국의 징표적 페미니스트 미술가 윤석남과 떠오르는 신진의 장파. 이들은 40여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 예술을 통해 세상과 여성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굳건한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 또 서사 구조 속에 문학적 감수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현대 페미니스트들은 자연적 성(sex)으로부터 문화적 성(gender)으로 시선을 돌려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구축되고 역사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여성 억압의 기원을 성을 둘러싼 남녀의 권력관계에서 찾는다. 1970년대 1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강조하는 본질론적 입장을 취했지만, 부계적으로 구축된 여성성에 대한 문제제기로 사실상 남성의 지배욕구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한계에 맞서 1980년대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성과 부계구조 자체를 불신하는 해체주의 국면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등장시키는데, 이는 이분법 구조자체를 무력화하려는 해체주의와 해체 이후에 생성되는 새 여성성을 개념화하는 후기 본질주의로 이원화된다.

윤석남과 장파의 작업은 해체주의를 등에 업은 후기 본질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젠더는 의미화 과정에서 산출된 하나의 기호일 뿐이고, 여성성이란 고정된 본질이 아니므로 변화 가능하다는 후기 본질주의 전제에 공감하며 작업을 통해 여성성을 정치화·미학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공통분모 속에서 윤석남은 모성과 여성의 역사, 장파는 여성의 욕망과 성애에 초점을 맞추는 담론적 편차를 보이며 여성성을 둘러싼 풍성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윤석남의 ‘핑크룸Ⅰ’(1996, 소파·나무판·아크릴 구슬 약 3만8000개·쇠못 20개·나무 문짝, 가변크기, 퀸즈랜드 아트갤러리 소장·)



윤석남의 실천, 장파의 언술



윤석남은 작품활동 초기부터 단체 활동에 투신했다. 늦깎이 화가로서 홀로서기보다 함께서기를 선호한 작가는 1985년 김인순·김진숙과 함께 ‘시월모임’을 결성, 동시대 지배사조였던 모더니즘 추상미술을 부정하고 여성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형상화를 채택했다. 이듬해엔 민족미술협의회 ‘여성미술연구회’(여미연)에 가담,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여미연’은 현대사에서 가혹한 길을 걸어온 여성의 삶과 노동현실에 주목, 그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경직된 권력구조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민중미술의 양식적 한계를 인식한 작가는 여성학·인문사회학자들이 주축이 돼 페미니즘 문화운동을 전개한 ‘또 하나의 문화’(또문)로 시선을 돌렸다.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강력하지만 부드러운 ‘또문’에서 페미니즘 의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그의 본격적 페미니즘 활동은 1996년 발족한 ‘여성문화예술기획’(여문)과 그 핵심 사업인 여성영화제의 이사장을 역임하며 빛을 발했다. 1999년 ‘여문’의 미술사업인 ‘팥쥐들의 행진’은 한국화단에 여성의 힘과 다름을 과시한 최초의 본격 페미니즘 전시회로 기록된다.

장파는 후기구조주의 담론과 페미니즘 이론에 관심과 지식을 가진 작가다. ‘미투’ 이후 등장한 ‘페미니즘 리부트’의 물결 속에 작업해왔지만 성향적으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구체적으로 후기 본질주의에 가깝다. 단체활동보다 개인작업에 몰두하는 그는 투철한 윤리의식에 기반한 페미니즘 진술이 진정성과 폭넓은 공감대를 얻으면서 역량있는 차세대 페미니즘 작가로 인정받는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조금이나마 덜 폭력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게…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지 않도록…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게 노력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장파의 작품세계는 2009년 ‘식물들의 밀실’로 시작되는 전반부, 2015년 ‘레이디-X’를 축으로 하는 후반부 시리즈로 대별된다. 전자가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사회적 범주와 부조리한 폭력을 배격하는 문명비판적 경향을 보인다면, 후자는 여성의 성적 욕망과 에로티즘을 해체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후기 본질론에 경도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천한 신체를 표상하는 괴물적 여성, 절단·변형된 ‘그로테스크’ 신체가 장파 본질주의의 요체다.

예술로 세상과 여성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윤석남, 장파의 대표작들이다. 위는 윤석남의 ‘종소리’(2002, 혼합재료, 가변크기, 개인 소장), 아래는 장파의 ‘나의 작은 폭도소녀’(My Little Riot Girl, 2015. Oil on canvas, 181.8×227.3㎝). 작가 제공





윤석남의 모성성과 모성상



윤석남의 화업은 어머니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1993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어머니의 눈’은 자신의 어머니께 바치는 헌정 전시이자 미술계에 모성담론을 촉발한 화제작이다. 여성의 일대기를 서사적으로 풀어낸 전시의 의미는 자전적 경험에 비춘 강인하고 지혜로운 모성과 여성적 특성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 점에 있다. 이러한 모성의 덕목은 부계적으로 제도화·강요된 희생적 모성에 의해 왜곡·폄훼돼왔다. 전시명의 ‘눈’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어머니의 눈이야말로 남성적 시선의 횡포를 직시케 하고 여성적 연대감, 포용적 모성을 회복시키는 주체적 여성시각이 아닌가.

작가는 이때부터 폐목·문짝·빨래판 같은 사물, 특히 폐목의 표면을 화폭 삼아 ‘회화적 조각’을 선보였다. 다듬지 않은 폐목의 여인상은 주름살 같은 외피의 질감이 고된 여성 삶의 흔적을 표상하고, 적당히 이어 붙인 몸체는 온전치 못한 여성의 몸·불안정한 정체성을 사유하게 한다. 죽은 생명을 살려내듯 목조 여성상으로부터 내 안의 모성상을 탄생시킨 것이다.

윤석남 작가가 자신의 작품 ‘핑크룸Ⅴ’ 앞에 앉아 있다. 학고재 갤러리 제공



1995년 이후 작가는 모성보다 여성성에 초점을 맞춰 ‘핑크 룸’ 시리즈를 발표한다. 화려한 핑크빛 색채와 조명의 환상적·초현실적 공간에 목조 여인상과 여성을 은유하는 의자가 등장한다. 의자 다리와 쿠션에는 무쇠 갈고리가 돌출돼 있다. 매혹과 공포가 공존하는 섬뜩한 ‘핑크 룸’을 통해 작가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이중 자아, 모성의 베일 속에 잠재된 여성 욕망을 분출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자신과 허난설헌·이매창·황진이 등 역사에서 망각된 여성 명사들과의 조우를 꿈꾸며 길게 늘어난 팔로 교감하는 ‘늘어나다’ 연작을 선보였다. 그중 ‘종소리’는 늘어난 팔의 손에 종을 쥐여줬다. ‘어머니의 눈’이 촉구한 여성적 연대감을 소리의 파장과 체온이 전달되는 따듯한 신체적 접촉으로 일궈낸 것이다.

2008년엔 개 1025마리의 집단 초상 ‘1025: 사람과 사람없이’를 발표한다. 5년간 나무를 자르고 덧붙이고 형상을 그려 완성한 작업은 모성이 인간애를 넘어 동물애로 확장된 페미니즘 성찰의 종결판이다. 인간과 동물이 공생하는 원형적 비전과 모든 생명체의 고유 가치를 주장하는 생태윤리학적 발상으로 진정한 모성적 페미니즘, 환경생태학적 에코페미니즘을 구현한 것이다. 개 작업 이후 그는 가부장제의 육식문화, 여성·동물 간 상호 중첩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채식주의자가 됐다.



장파의 식물성 욕망



장파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존재감을 안겨준 작품은 2015년 이후 선보이고 있는 ‘레이디-X’ 시리즈다. 작가는 나무를 애욕하는 성향으로 성적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소녀 레이디-X를 통해 여성적 에로티즘과 성적 욕망의 본질을 분석한다. 장파의 소녀는 캔버스·유채라는 전통 페인팅 수법으로 재현되지만 고전 여성상과 거리가 먼 기괴함의 극치로 시각화된다. 과감한 노출과 뻔뻔스러운 자세, 기형적·변태적 형상은 화면을 흘러 넘치는 분홍과 선홍색의 붓 터치로 효과가 증폭된다. 윤석남의 ‘핑크 룸’과 마찬가지로, 유혹적이면서 불길해 보이는 핏빛 핑크 화면은 그로테스크한 과장으로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며 부계적 상징계로부터 모계적 상상계로의 탈출이라는 대역전의 기시감을 안겨준다.

소녀의 도착증은 무성한 나무들과 숲을 무대로 펼쳐진다. 숲은 소녀와 나무가 교감하는 탈경계적 해방의 공간, 식물적 상상력으로 남성성과 동물성이 추방되는 공간이다. 나무는 식물성 욕망, 욕망하는 식물의 기표로 남근중심적 성적 위계를 좌절시키고 여성의 원형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비폭력 저항을 은유한다. 살생과 육식 폭력의 흔적을 지우고자 채식을 선택한 한강의 <채식주의자> 주인공처럼, 채식주의자가 된 윤석남처럼 레이디-X는 나무를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식물계와 교감하는 영매, 여성적 리비도의 근원으로 등극시킨다.

장파의 작업은 ‘플루이드 네온’ ‘잔혹한 피부’ 등 후속 시리즈로 심화된다. 특히 ‘체셔 고양이처럼 웃는다’ ‘나의 작은 폭도소녀’ ‘강탈당한 머리카락’ 등은 위악적·풍자적인 장파의 작품세계를 명시한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얼굴, 얼굴로부터 탈착된 눈알, 텅 빈 구멍들로 변한 눈과 입과 자궁 등은 그로테스크한 여성상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흥미로운 점은 소녀를 대변하는 이 모든 형상들이 섬뜩한 웃음을 띠고 낯익은 낯섦이 불러일으키는 프로이트적 ‘언캐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소녀의 웃음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신체는 사라지고 웃음만 남은 기괴한 체셔 고양이를 소재로 한 장파적 그로테스크의 특징이자 장파 본질주의의 전략적 무기다. “페미니스트 주체를 상정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전략적 본질주의를 구사”한다는 그의 언급처럼, 장파는 위장된 웃음으로 근엄한 상징계를 조롱한다. 상징계가 밀쳐낸 주변적인 것, 침묵·억압당한 것을 복권시키는 작품들을 통해 본질주의적 젠더 수행을 실천한다.

윤석남의 ‘핑크룸Ⅰ’(1996, 소파·나무판·아크릴 구슬 약 3만8000개·쇠못 20개·나무 문짝, 가변크기, 퀸즈랜드 아트갤러리 소장·위). 장파의 ‘Lady-X no.5’(2015, Oil on canvas, 91×60.6㎝). 작가 제공





윤석남과 장파



윤석남과 장파의 페미니즘은 여성적 본질이라는 공유지대를 점하면서도 모성과 성애라는 특정 주제에 주목, 인식론적 지향점을 달리하고 있다. 두 작가의 이러한 차이는 후기본질주의 두 축인 미국의 여성중심론과 프랑스 네오페미니즘에 비춰볼 때 그 요지가 분명해진다. 윤석남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모성적 사랑과 여성의 힘을 발견하고 작품을 통해 ‘체험된 모성’을 형상화한다. “나에겐 이 땅에 여성으로 태어났고 여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여성의 관계지향적 특성, 역사적으로 경험되는 모성의 역할, 능동적 모녀관계를 강조하며 제도화된 사회적 모성과 부계적 가족개념이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여성중심론의 요지와 맞닿는 대목이다.

한편 식물적 리비도로 남성성에 도전하는 장파의 페미니즘은 거세된 성으로서의 여성과 여성 문체의 부재를 동일시하며 몸으로 쓰는 자기애적인 여성적 글쓰기를 주창하는 네오페미니즘과의 유추가 가능하다. 레이디-X의 재현적 특성들, 메두사풍의 냉소적 웃음과 거세공포를 일깨우는 자궁도상·핏빛 붓질의 생리혈·촉각적이고 액체적인 형광핑크 화면은 네오페미니즘의 육체적 발상, 즉 하얀 젖으로 쓰는 비가시적 글쓰기와 액체적·촉각적인 자궁선망적 문체를 환기시킨다. 결국 해체적이고 과장된 장파의 형상은 여성의 재현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여성적 글쓰기의 회화적 실험, 미술적 실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성중심론과 네오페미니즘은 해체주의를 수용, 이전 세대의 본질주의를 극복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도 내포한다. 즉 여성의 동질성·유사성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중심주의로 흐르거나, 여성의 신체적 특징에 천착해 생물학적 본질론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주의는 대중적 호소력과 실존적 생명력을 지닌 까닭에 후기 본질주의에 이어 지금까지도 다수 페미니스트들의 불후의 명제가 되고 있다. 윤석남과 장파 역시 본질주의 한계 속에서 본질주의를 전략화하는 동종요법적 발상으로 각자 고유의 페미니즘 미술을 완성시켜 나가고 있다.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큐레이터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 대안공간 쌈지스페이스 관장 등을 거쳐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카셀도큐멘타14 감독선정위원·광주비엔날레 총감독·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다수의 페미니즘 미술전과 백남준·미디어아트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 <여성과 미술> <굿모닝 미스터 백>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산다> 등이 있다. 김세중상(저작출판), 석주미술상(평론), 월간미술대상(큐레이터) 등을 수상했다.


김홍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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