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에 잡힌 '드라이버'든 노인의 정체

전현진 기자 2021. 2. 8.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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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러스트 김상민


지난 3일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서울중앙지법 423호 법정에 한 남성이 들어섰다. 그는 유독 기운이 없어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뒤에서 그를 밀어주는 건장한 남성 탓인지 더욱 왜소하게 보였다. 그의 희끗한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안경알 너머 두 눈은 힘 없이 감겨 있었다.

법정에선 형사합의24부(재판장 소병석)의 판결 선고가 진행 중이었다. 그가 오기 전 이미 두 건의 사건에 대한 판결이 선고됐다. 인력소개사무소장을 계획적으로 살해한 남성에겐 징역 25년, 길가던 행인에게 우산 쓰고 가는 모습이 거슬린다며 흉기를 휘두른 또 다른 남성에겐 징역 4년이 선고됐다. 그 다음이 황토색 수의를 입은 김씨의 차례였다.

서울 종로구의 낙원상가 인근에서 돼지국밥집을 운영하는 유모씨는 지난해 10월7일 오전 가게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다고 했다. 철제 여닫이 문을 자물쇠로 잠궈뒀는 데 경첩이 뜯겨져 나갔고, 식당 안 곳곳이 난장판이 돼 있었다. 잔돈을 모아둔 저금통은 사라지고 없었다.

“담배 같은 걸 사고 500원짜리 남으면 넣어두고 몇 년 동안 그랬는데 가져가 버렸어. 10만~20만원쯤 있었을 텐데.” 지난 6일 만난 유씨는 먹음직스런 수육을 썰면서도 그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유씨는 가게를 비추는 폐쇄회로(CC)TV에 녹화된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고 황당함을 느꼈다. 화면에는 검은 패딩 조끼에 흰색 운동화를 신은 노인이 보였다. 금속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가게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왔는지 불편해 보이는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뒤졌다. 처음엔 큰 돈을 훔쳐간 것도 아니라 신고를 안 하려고 했다. “그날은 그냥 장사 준비하고 일하다가 저녁인가 다음날인가 신고했어요. 다른 가게도 당하면 안 되니까 신고는 해야겠더라고.”

유씨의 가게에서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작은 식당에도 며칠 뒤 밤손님이 다녀갔다. 이 식당 주인 박모씨 설명을 들어보면, 지난해 10월11일 가게에 도착해보니 누군가 부엌에서 음식을 꺼내먹고 계산대에 있던 돈을 꺼내 가져갔다고 했다. 박씨는 도둑이 어떻게 가게 안으로 들어왔는지 잘 모른다고 했는데, 그 답은 출입문에 새겨져 있었다. 이 가게 문은 나무로 돼 있었는데 문고리 부근 문틈 사이로 잠금장치가 걸리는 부분에 일(一)자 드라이버를 넣고 휘저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가게 부근 CCTV로 보니 역시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다. 박씨는 “그러려니 하고 신고만 하고 조사는 받으러 가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 노인이 바로 김씨다. 김씨는 늦은 밤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지난해 9월29일쯤부터 10월13일까지 모두 11곳의 식당에 침입해 현금이나 음식을 훔친 혐의(상습특수절도)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씨는 한 다방에 들어가 현금 5만원과 배(과일) 6개 훔쳤고 탄산수 한 병을 뜯어 마셨다. 다음날 한 식당에 들어가 빵을 뜯어 먹고 비타500 1병과 귤(과일) 1개를 훔쳤다. 바나나 4개를 훔쳐가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가게에 침입해 5만~30만원 현금을 훔친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재판 내내 CCTV가 조작됐고,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러 붙잡히려고 한 것으로 의심이 들 정도로 증거는 넘쳤다. 경찰이 김씨를 긴급체포한 주거지(여관)에서 일자 드라이버를 발견했다. 재판에 넘겨진 사건 중 침입 방법이 불확실한 범행을 제외하면 모두 일자 드라이버를 이용해 잠금장치를 열고(부수고) 침입했다. 경찰은 평소와 동일한 옷차림을 하고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없는 그가 능숙하게 일자 드라이버로 ‘잠금해제’ 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담긴 CCTV도 확보했다. 먹다 남은 탄산수병과 빵에서 그의 유전자(DNA)가 나왔다. 사건 모두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의 상점을 늦은 밤부터 새벽 시간대를 노리는 범행 형태가 비슷했다.

김씨는 이미 동종 범죄로 처벌 받은 전력이 많았다. 재판부에서 확인한 이전 동종 범죄들도 드라이버 같은 도구로 상점에 침입하는 것이었다. 대신 CCTV 해상도가 낮거나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범행 3건에 대해선 무죄가 나왔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저지른 (범행)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한다”면서도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했다.

김씨에겐 징역 3년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이미 동종 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다수 있음에도 야간에 8회에 걸쳐 범행을 저지른 점”을 불리한 사정으로 “피해액이 소액인 점, 피고인이 고령으로 당장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점”은 유리한 정상으로 봤다. 지난해 처음 적발된 김씨의 범행은 9월29일에 있었다. 그날은 김씨가 9월27일 안동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이틀 뒤였다. 1941년생인 그는 올해 79세가 됐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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