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성추행 걸려도 법복 벗으면 끝.. 관대한 내부 잣대 [탐사기획-법관징계 리포트]

이희진 2021. 2. 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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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피고인 측 금품 받고 조폭과 골프
지하철서 성추행하다 현행범 체포돼도
징계 없이 사직·구두 경고 30년간 55건
언론 보도 안 된 사례 합치면 훨씬 많을 듯
징계절차 중 사표 불허 '예규' 만들어도
비리 판사들 사표 그냥 수리 '무용지물'
"사법농단 지목된 판사 66명 공개 거부
법원 '제식구 감싸기' 여실히 드러낸 것"
“적어도 누가 연루됐는지는 시민들이 알아야 되잖아요. 하긴, 법원이 당사자인데 공개하고 싶을 리가 없죠.” 지난달 13일 취재팀과 만난 김태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간사는 검찰이 2019년 3월 “사법농단에 연루됐다”며 법원에 건넨 판사 66명의 명단이 여태껏 공개되지 않고 있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2019년 ‘66명 명단과 비위내용을 알려달라’며 수차례 법원에 정보공개를 청구했으나 이의신청을 포함해 모두 비공개 통보를 받았다. 모든 시도가 허사가 되자 지난해엔 “명단 비공개가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는 왜 명단 공개에 매달리고 있는 걸까.
게티이미지뱅크
“그동안 사법부는 ‘제 식구 감싸기’ 관행을 여실히 보여줬어요. 사법농단을 ‘위헌적 행위’라고 못 박고도 여태껏 징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게 대표적이죠. 이대로라면 또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넘어갈 게 뻔해 보이네요.” 그의 말에선 법원에 대한 불신이 묻어났다. ‘잘못한 사실이 드러나면 바로 법복 벗고 나가기’라는 법원의 오랜 관행은 이런 불신을 키운 주범이었다.

◆징계 없이 사표 수리, 최소 32명

7일 취재팀이 학계 연구를 토대로 언론보도들을 확인한 결과, 사법부 불신의 일단이 드러났다. 1990년 1월 이후 언론에 보도될 정도의 비위나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큰 물의를 일으켰으나 징계가 청구되지 않은 법관 사례가 최소 55건은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중 절반이 넘는 32명이 사표를 냈고, 대법원은 징계 없이 사표를 수리했다. 나머지는 구두 경고나 주의, 전보 조치로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징계청구 사안에 대한 판단은 사안의 성격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언론에 보도됐다고 무조건 징계감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헌법기관이자 인권과 정의 수호의 마지막 보루로서 사법부와 법관의 존재 이유를 감안했을 때 납득이 어려운 사례가 적지 않았다.

다른 공직자였다면 무겁게 처분했을 금품·향응수수 등이 대표적이다. 취재팀이 취합한 55건 중 28건(50.9%)이 금품·향응 관련이었다. 2006년 조모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사건 청탁을 대가로 ‘법조 브로커’ 김홍수씨에게서 1억2000만원의 금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따로 징계가 청구되지 않았다. 사표를 내고 나간 그는 알선수재 혐의가 인정돼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같은 해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선 재판에 넘겨진 조직폭력배 출신 피고인의 동생으로부터 향응과 골프 접대를 받은 판사들의 사표가 대법원 조사 도중 수리돼 비판 여론이 고조됐다.

이에 대법원은 2006년 ‘법관의 의원면직 제한에 관한 예규’를 제정해 징계가 청구됐거나 수사 통보 혹은 직무상 위법행위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사표를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듬해 폭력조직 출신과 어울려 필리핀 등지에서 골프 접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 정읍지원 판사를 비롯해 예규 제정 이후 사표가 수리된 사건은 14건이었다.
2017년엔 ‘은폐 의혹’까지 제기됐다. 법원행정처가 검찰로부터 문모 부산지법 부장판사의 골프·유흥 접대 비위 정황이 담긴 문건을 전달받고도 구두경고로 매듭지은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다. 해당 판사는 지역 건설업자로부터 수년간 10여차례 룸살롱과 골프접대를 받았으나 징계가 청구되지 않았다.

성범죄 사건도 4건이나 됐다. 2011년 황모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20대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현행범 체포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감찰 착수 뒤 사의를 표명한 황 판사의 사표를 즉각 수리했다. “직무 관련 위법 행위가 아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2015년 징계 없이 사표 수리된 유모 울산지법 판사는 대학 후배 성추행 혐의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유 판사는 노래방에서 피해자의 민감한 부위를 만지고, 얼굴에 입을 맞췄다.
게티이미지뱅크
◆“알려지지 않은 사례 훨씬 많을 것”

언론에 알려진 것만 이 정도일 뿐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넘어 간 사례는 더 많을 것이란 게 법원 안팎의 관측이다. 그동안 꾸준히 불거진 판사 막말 논란만 봐도 그러한 짐작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2015년 이모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온라인 댓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투신의 제왕’에 비유하는 등 수천건의 막말 댓글을 달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법원 내부에서도 “중징계가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일었다. 하지만 법원 결정은 전보 조치 후 사표 수리였다. 이밖에도 40대 판사가 69세 진정인에게 “어디서 버릇없이 툭 튀어나오냐”고 말하거나, 피고인 대리로 나온 70대 할머니에게 “딸이 아픈가본데 구치소 있다 죽어나오는 꼴 보고 싶으십니까?” 등의 막말 사례가 꾸준했으나 징계로 이어지진 않았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봐주기 관행은 외국에도 있으나 우리나라가 좀 심한 편”이라고 꼬집었다.

◆고위법관의 징계 재량권 줄여야

이런 관행들의 근저엔 ‘법복을 벗는 것이 곧 중징계’라는 사법부의 그릇된 인식이 깔려있다. 일부에선 법관에 대한 법원의 징계청구권과 결정권 독점이 제식구를 감싸게 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징계위원 구성 다양화 등을 통해 징계에 대한 법원 고위층의 재량권을 축소하고 징계 절차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징계위원회에 외부위원보다 법관이 한 명 더 많아 법관들의 의견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외부위원을 실질적으로 꾸려 제대로 된 심의를 할 수 있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법조팀=이희진·송은아·김선영·이창수·이창훈 기자 heejin@segye.com

※55건의 비위 내용은 온라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취재했습니다 - 1995∼2019년 데이터 취합 전문가 3인에 분석 의뢰
 
세계일보 취재팀은 관보에 오른 ‘대법원공고(징계처분)’에서 1995∼2019년 이뤄진 43건의 법관 징계 데이터를 취합한 후 공무원 징계 및 윤리 전문가 3인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분석에 참여한 강호석 변호사는 2018년 1월부터 인천시 행정심판위원으로서 공무원 징계처분의 적절성 등을 심사하고 있다. 오정일 경북대 교수(행정학)는 경상북도 소청심사위원회에 접수된 징계 사건 303건을 토대로 공무원 징계제도를 분석한 바 있다. 이유봉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공직윤리 강화를 위한 공직자윤리법 정비방안’(2015) 등을 펴낸 공직윤리 전문가다.
 
이들에게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법관과 타 공무원의 징계수위 비교 및 전반적인 평가, 개선 방향 등을 요청했다.
 
징계 법관들의 당시 직급과 사법연수원 기수, 변호사 개업 시점, 나이, 성별 등은 대한변호사협회와 법조인 정보 사이트 등을 통해 확인했다. ‘무징계 법관 사례’는 박준 전 서울대 교수의 ‘법관·검사 징계 사례에 관한 연구’(2014) 논문을 참고했다.
 
논문과 뉴스분석 시스템 ‘빅카인즈’,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등을 통해 1990년 1월 이후의 사례 55건을 취합했다.
 
개별 사안에 대한 가치 판단은 없었으며 다수의 언론이 비판적으로 보도한 경우만 특정해 집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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