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친일인명사전 오른 김영준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까닭은?

안관옥 2021. 2. 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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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기 헌납 등 '친일부역' 전력
여순사건서 좌익세력에 처형
2007년 국립묘지에 이장된 사실
'역사공간 벗' 조사결과 밝혀져
보훈처 "사망 당시 경찰 소속돼
경찰묘역에 안장된 것" 해명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1942년 1월16일치에 실린 김영준의 애국기 자금 헌납 기사.

“전남 여수의 금곡영준(金谷英俊)씨가 미영격멸 애국기 헌납자금으로 5만3천원을 기탁하였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2년 1월16일치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금곡영준은 당시 조선의 재벌급 거부 김영준(1898~1948)이 일본식으로 바꾼 이름이다. 김영준은 전쟁협력을 위한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군용기 1대를 헌납하기 위해 10만1천원을 내겠다고 공언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그는 1921년부터 일본 고베의 고무공장에서 일한 뒤 1926년 귀국한 뒤 부산 여수 익산 남원 등에서 천일고무, 흥아고무, 여수면포, 조선고무화판매 등 여러 회사를 차렸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1940년 광주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로 사상범 교화에 앞장섰고, 1941년 전남도회 의원과 여수상공회 회두(대표) 등을 지내며 일제 경찰에 전화가설비로 1만원을 바쳤다. 부역의 대가로 일본 기원 2600년 봉축전에 초대받아 기념장을 받고, 이후에는 전쟁 수행에 거금을 헌납하며 감수포장을 받는 등 일제의 눈에 들었다. 그는 일제가 경제를 장악한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로 승승장구했다.

김영준은 해방된 뒤에도 기득권을 지켰다. 막강한 재력이 바탕이 됐다. 그는 우익계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여수군지부장과 한국민주당 여수군지부장을 지냈고, 여수상공회의소 회장, 전남상공회의소 회장, 조선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으로 보폭을 넓혔다.

그러나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그의 운명은 급반전했다. 당시 서울에 있던 그는 1948년 10월18일 맏형 김재준의 생일을 쇠러 여수에 왔다가 좌익 세력에게 체포됐다. 이어 닷새 뒤인 10월23일 여수보안서에서 50살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이날 잡혀 있던 120명 가운데 처형당한 이는 경찰관 2명과 김영준을 포함한 민간인 10명 등 모두 12명이었다.

대전 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된 애국단원 김영준의 묘. 역사공간 벗 제공

그는 사망 뒤 여수시 둔덕동 묘지에 묻혔다. 가족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이주했다. 1969년 그는 일제 때 여수 미평초등학교에 학교 터를 기부했던 사실로 여수상공회의소의 추천을 받아 여수시에서 시민상을 받았다.

그리고 숨진 지 60년 뒤인 2007년 8월21일 대전 현충원 경찰묘역(경찰 2-511-2384)에 애국단원 신분으로 안장됐다.

소문만 나돌던 그의 국립묘지 이장은 지난 2일 여순항쟁 연구모임인 ‘역사공간 벗’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다. 이 모임 대표인 현대사 연구가 주철희 박사는 “설마 했는데 황당하다. 죽지 않았더라면 삼성급 재벌이 여수에서 나왔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그의 행적은 뚜렷했다. 친일부호였던 그가 국립묘지, 그것도 경찰묘역에 애국단원으로 묻혔다니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대전 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된 애국단원 김영준의 묘 뒷면. 역사공간 벗 제공

여순사건 우익 피해자 중 애국단원으로 분류돼 경찰묘역에 안장된 인물은 김영준 외에도 유영채(48년 11월4일 사망), 서병관(48년 10월21일 사망), 김용주(48년 10월23일 사망) 등 상당수가 확인됐다.

‘역사공간 벗’의 조사 결과, 경찰신분 우익인사(애국단원·향방단원 등), 애국청년단원, 대한청년단원 등으로 현충원에 묻힌 안장자는 1303명이었다. 이 가운데 김영준, 유영채 등 164명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숨진 이들이다. ‘역사공간 벗’은 “보훈처는 민간인 안장 근거로 전시근로동원법, 경찰원호법 등을 들고 있다. 하지만 묘비에 전사로 표기된 김영준은 당시 50살로 경찰이 아니었고, 전투에 참여한 적도 없다”며 “한국전쟁 이전 숨진 애국단체원 등 164명의 안장 경위를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보훈처는 “김영준은 1961년 국가유공자(전몰군경)로 결정된 안장 대상자이고, 사망 당시 소속(경찰)에 따라 경찰묘역에 안장됐다”며 “경찰원호법(51년)과 전시근로동원법(53년)에는 애국단체원으로서 경찰과 함께 전투나 훈련, 또는 전투에 준하는 행위로 사망하거나 부상한 경우 원호(돕고 보살핌)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밝혔다.

안관옥 김용희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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