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사회는 그에게 물을 주었고, 그는 세상에 희망을 주었다
편집자주
영국 좌파 정치인 토니 벤(Tony Benn)의 삶에 주목해 2014년 4월 시작한 '가만한 당신' 연재가 곧 만 7년이 됩니다. 낯설게 끌리는 이들을 찾아 생애를 되짚어보며, 가당찮은 바람이지만 그들의 삶과 일, 무엇보다 마음에 닿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게 제겐 값지고 때로은 버거운 공부였습니다. 그들의 처지가 우리와 너무 달라 갈 길이 아득해 보일 때, 그래서 이입하기 힘들 때 특히 버거웠습니다. 이제 그 간극에 대해, 그들과 우리의 같고 다름에 대해, 제가 느끼는 바를 조심스럽게 곁들여 써보고자 합니다. 부고의 소재-형식에 에세이의 메시지를 섞은,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꺾인 꽃 자리 빈 들 한 쪽에 아름다운 것들이 또 가만히 자리하기를 바라는' 연재의 첫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지적장애인 국제 체육 행사인 '스페셜 올림픽'의 창설에 기여한 다운증후군 수영선수 마이클 큐잭(Michael Cusack)이 12월 17일 별세했다. 향년 64세. 그가 한 일은 물만 보면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들어 신나게 활개친 게 거의 전부였지만, 그 소박한 열정이 세상 한 켠을 달라지게 했다. 소수의 사람들을 열정으로 사로잡아 뭐든 해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했고 실천하게 했다.
정반대로 말할 수도 있겠다. 한 어린 장애인의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열정에 특별히 주목한 이들이 있었다고. 몸으로 물을 밀며 몸을 미는 동안, 그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었다. 극복해야 할 제약도, 도움 받아야 할 결핍도 아니었다. 장애는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기지만, 어떤 제약과 불편은 세상이 만들고 사회가 강요한다는 것, 폄하와 차별이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그를 보며 깨달아갔다.
큐잭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그러므로 그가 목에 걸고 자랑스러워했던 수많은 메달과 리본이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주의(ableism)'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장애에 대한 무지의 부끄러움과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라 해도 되겠다.
장애-비장애, 무능- 유능의 이분법
큐잭은 1956년 5월 6일, 미국 시카고 라잉인(Lying-in) 병원에서 경찰관 아버지 존과 전업주부 어머니 에스더의 둘째로, 다운증후군을 지닌 채 태어났다. 의사는 '아이가 정상적 삶을 누릴 수 없으니, 돌보느라 고생하지 말고 일찌감치 시설로 보내라'고 조언했다.
다운증후군은 선천성 염색체 질환이다. 부모에게서 각 23개씩 46개의 염색체를 받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수태 전후 알 수 없는 이유로 21번 염색체에 여분의 염색체가 끼어들어 47개의 염색체를 지니면 그리 된다. 신생아 800~1,000명 당 1명 꼴로 태어나며, 지적장애 등 육체적-정신적인 차이를 발현하고, 여러 잠재적 합병증에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아직 예방도 완치도 불가능하다.
장애- 비장애를 비정상- 정상, 무능- 유능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장애인을 우생학적 단종시술로 도태시키거나 시설에 강제수용해 격리- 배제하던 때가 있었다. 미 연방대법원이 장애인 시설 수용자에 대한 불임-단종시술을 수정헌법 14조(평등조항) 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한 게 1927년이었고(Buck v. Bell), 큐잭이 태어난 50년대에도 장애인은 시민적 자질인 자립-자결 능력이 결여된 존재여서 시설에 수용하는 게 그들과 공동체 모두에 이롭다는 게 상식이었다.('장애의 역사' 참조. 킴 닐슨 지음, 김승섭 옮김, 동아시아)
의사들의 조언도 아마 선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그를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일리노이 주가 지적장애인 공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한 건 60년대 말이었다. 부모는 큐잭과 유사한 장애를 지닌 아이의 부모들을 수소문해 돈을 모아 창고를 임대하고 은퇴 교사를 고용해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 큐잭은 세발자전거 타기나 공놀이 등 몸 쓰는 놀이에 유난히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가족은 그의 애칭 '미키(Micky)' 뒤에 '마우스(Mouse)' 대신 '무스(Moose, 크고 힘센 사슴 종인 말코손바닥사슴)'란 별명을 붙였다. '미키 무스'는 무스처럼 건강하게 성장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장애(disability)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ability)이다
65년 시카고 파크디스트릭트 당국이 장애인 레크레이션 프로그램을 시범운영한다는 공고를 냈다. 갓 고교를 졸업한 만 20세 체육교사 앤 버크(Anne Burke, 1944~)가 거기 자원했고, 첫 학생으로 큐잭을 만났다. 물만 보면 환장을 해서 제어하기조차 힘들던 큐잭은 점차 놀이와 학습을 구분하게 됐고, 고된 훈련에도 성실히 임했다. 버크는 연습이 끝난 뒤 큐잭 가족과 함께 식사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2년 뒤 버크의 제자는 약 100명으로 늘어났다.
대다수 지적장애 아이들이 시설에 수용되거나 부모의 염려 때문에 바깥 출입을 거의 못 하던 때였다. 버크가 지적장애인 체육행사를 열자고 지자체에 제안하자 담당 공무원은 "그런 아이들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려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공무원은 장애를 볼거리로 즐기던 '프릭쇼'같은 걸 연상했겠지만, 버크가 주목한 건 장애(disability)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ability)이었다.
버크는 워싱턴D.C의 '조셉 케네디 재단(Joseph P. Kennedy Jr.Foundation)'에 기획서를 내밀었다. 당시 이사장이 존 F. 케네디의 누이인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Eunice Kennedy Shriver, 1921~2009)였다. 언니인 발달장애인 로즈(Rosemary Kennedy, 1918~2005)가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뒤 증상이 악화해 '시설'에 입소하면서 의료진 조언에 따라 장기간 면회도 못한 상처가 유니스에겐 있었다. 그는 평생 장애인 복지에 헌신했고, 오빠가 대통령이 된 이듬해인 62년부터는 로크빌 팀버론(Timberlawn)의 너른 땅을 빌려 지적장애 아동을 위한 4주 여름캠프를 운영하기도 했던 터였다. 유니스는 버크에게 2만5,000달러의 기금을 주고 대회 조직과 홍보에도 발벗고 나섰다.
오빠 로버트가 암살당하고 6주 뒤인 68년 7월, 100명 남짓 관중이 모인 시카고 솔즈필드 스타디움 '제1회 스페셜 올림픽' 개막식 연단에 서서, 그는 "언젠간 전 세계 지적장애인 100만 명이 이 무대에서 활약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곤 비서에게 수영복을 구해오게 한 뒤 아이들과 함께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미국 26개 주와 캐나다 선수단 1,000여 명이 참가해 이틀간 치른 첫 대회 이래 스페셜 올림픽은 매 2년마다 분쟁지역까지 망라한 전세계 170여 개국 선수 500여 만 명이 예선을 거쳐 기량을 뽐내는 세계 최대 지적장애인 체육행사가 됐다.
그는 스페셜올림픽의 추진체였다
83년 시카고-켄트 로스쿨을 졸업해 현 일리노이 주 대법원 수석판사로 재직 중인 버크는 "큐잭의 재능, 기량을 익히고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나로 하여금 대회, 진짜 대회를 만들 생각을 하게 했다"고(##4), "그가 (스페셜올림픽의) 추진체(impetus)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슈라이버를 기렸다. 지금도 스페셜올림픽이라면 발벗고 나선다는 버크는 "우리는 잊혀도 상관없다. 하지만 유니스가 없었다면, 오늘의 스페셜올림픽도 없었으리란 사실은 마땅히 기억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 훈련을 받은 지체장애인들이 치열한 순위 경쟁을 벌이는 엘리트 스포츠 '패럴림픽'과 달리, 스페셜올림픽은 최소한의 경기력을 갖춘 만 8세 이상 지적장애인이면 누구나 참가해 기량을 뽐내며 우애와 사회적 적응력을 기르는 데 목적을 둔 행사다. 순위를 가리긴 하지만 메달이나 리본은 참가자 전원에게 수여한다. 큐잭은 1회대회 25야드(22.86m) 자유수영 종목에서 1위를 차지한 이래 거의 매 대회에 출전하며 한꺼번에 목에 걸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메달과 리본을 땄다.
72년 LA대회 땐 경기 도중 수영복 끈이 풀리자 아예 트렁크를 벗고 경기를 마쳤고 "곧장 풀에서 나와 자기 기록을 확인한 뒤 다시 물에 뛰어들어 수영복을 챙겨 입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아이처럼 경기에 몰두했고, 기량도 뛰어나 한 코치(Pat Molly)는 "내 수영 실력도 꽤 좋은 편이지만 그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 나를 앞지르곤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 인상적인 건 이긴 뒤에도 승리감에 도취돼 으스대는 법 없이, 무심히 제 할 일을 하곤 했다는 점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큐잭은 관중들의 주목과 갈채를 즐겼지만, "그건 자의식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했고, 사랑받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 "시합에 졌을 때도 늘 경쟁자에게 먼저 다가가 축하했고, 단 한 번도 결코 질투하지 않았다"고 그의 가족들은 회고했다.
큐잭은 2006년 뇌졸중으로 왼쪽 팔이 마비될 때까지 만 40년을 현역 수영선수로 활약했고, 농구 스키 실내하키 골프에도 능했다. 뇌졸중을 앓고 난 뒤에도 그는 오른팔로 볼링을 했다. 그의 사회는 그가 저 다양한 운동을 익히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박수를 쳐주었다.
79년 인터뷰에서 어머니 에스더는 처음엔 남편도 자신도 아이의 스포츠 입문을 염려했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환대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것도 경쟁 무대에서, 아이가 상처 받을까봐서 였다. 어머니는 "이제, 스포츠 없는 마이클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스포츠를 시작한 뒤 그는 표나게 침착해졌고, 제 안의 수많은 멋진 것들, 예컨대 자신감을 스스로 찾아냈다. 그는 훌륭한 운동선수이고,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네 누이를 비롯한 온 가족이 그의 후원자이자 동반자였고, 열성적인 장애인 봉사활동가였다. 누이 중 둘은 특수교육 교사가 됐고, 조카는 장애인 레크레이션 상담가가 됐다. 또 다른 코치 제리 헤너건(Gerry Henaghan)은 "큐잭 가족 전원이 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표준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고, 맏누이인 캐럴(Carole)은 "스페셜올림픽이 그에게 세상을 열어주고 그의 삶을 풍성하고 뿌듯하게 해준 것처럼, 우리 가족에게도 똑같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가족은 1990년 미국 장애인법 제정 캠페인에도 앞장섰다.
젠더 인종 장애 차별은 얼마나 다른가
'여성은 생리와 출산으로 몸이 손상되므로 스스로와 사회 전체를 위해 고등교육과 일자리로부터 완전히 배제'돼야 하며, '감정적 성향과 논리 및 판단력 부족 때문에 스스로 자유를 누리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상식이던 때가 있었다. 흑인은 '현대의 문명화된 삶을 감당하기에는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부족'하며 '신경계가 발달하지 않아 문명과 더 많이 접촉할수록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심지어 의료전문가들이 주장하던 때가 있었다.(위 책 '장애의 역사')
젠더-인종 차별의 의과학적 근거가 된 저런 주장을 믿는 사람은 이제 드물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비장애인의 의식-무의식 속에, 사회제도와 구조 속에 온존하고 있다. 장애란 렌즈로 미국사를 조명한 킴 닐슨은 저 책에서 장애는 고정불변의 몰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고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썼다. 큐잭의 수영장처럼, 물리적-구체적 장애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기회, 시설과 공간과 사회제도를 마련할 책임은 공동체에게,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정치인과 행정가에게 있다. 헬렌 켈러처럼 장애인으로서 큰 성취를 이룬 위인을 칭송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하지만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헬렌 켈러가 차별적으로 누린 교육 등 여러 기회에 주목해야 한다.
지난해 말, 대한민국 21대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장애인 고용, 주거, 보건, 생활, 문화 이슈들은 전년과 거의 다를 바 없이 또 제기됐다. 장애인 생활환경(Barrier Free) 인증 의무 대상인 공공시설 인증률이 34.7%에 불과하고, 휠체어 장애인은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 조작이 불가능하고, 시각장애인용 음성지원 단말기는 27.8%에 불과하고…, 주관기관인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저 사업에 배정한 예산은 전체의 0.056%에 불과하고, 탈시설장애인 중 자립정착금을 지원받은 이는 4.1%에 불과한 현실. 여전히 미달하는 공공기관-민간기업의 장애인 의무고용비율…. 2008년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을 비준하고도, 권리 구제 및 청원-진정을 통해 실효적 효력을 발휘하게 하는 선택의정서는 12년 넘게 내팽개쳐 두고 있는 위선….
후보시절 문재인 대통령이 복지공약 1호로 내건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도 수많은 장애인 가족이 저 기준때문에 의료급여와 생계급여를 신청하지 못해 숨져가는 동안에도, 장애인들의 삭발 농성투쟁이 이어지는 지금도 여전히 기약이 없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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