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시대 견딘 끈끈한 '브로맨스'..화가가 문인을 만났을 때
구본웅+이상 이중섭+구상 백석+정현웅..
격동의 1930∼50년대 살던 문인·예술인
글·그림 경계 넘어 뜨거운 예술혼 나눠
회화 140점, 서지자료 200점 등 640여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1934년 시인 이상(1910∼1937)은 경성 종로통에 다방을 연다. 이름 하여 ‘제비다방’. “특별한 장식 없이 희멀쑥한 벽”에는 누런색을 띤 우울해 보이기 그지없는 자신의 자화상을 걸었고, 프랑스 영화감독 장 콕토의 경구를 옮겨 적은 액자를 붙였다. 그중 특별히 눈에 띄는 그림이 있었으니, 화가 구본웅(1906∼1953)의 야수파풍 유화. 한번은 정물화, 한번은 인물화, 대부분은 여인화였는데, 단연 압도적인 작품은 ‘친구의 초상’(1935)이란 그림. 이상을 그린 거였다.
#2. 1941년 문인 조풍연(1914∼1991)의 결혼식. 1934년 ‘삼사문학’을 창립한 그는 1939∼1941년 인기를 끈 문예지 ‘문장’의 편집에도 열중했다. 시·소설 등 글도 글이지만 표지화와 삽화가 특히 유명했던 잡지. 그러던 그가 결혼을 한다고 하자 진풍경은 다른 데서 나왔다. 화가 길진섭·김용준·김규택·정현웅·윤희순·김환기·이승만 등이 한 토막씩 그림을 그려 그에게 선물을 한 거다. 238㎝ 길이의 ‘조풍연 결혼 축하 화첩’(1941)은 그렇게 나왔다.
#3. 1951년 한국전쟁 중 부산 피란지. 둥그런 달이 뜬 밤바다에 배 한 척이 고즈넉이 솟았다. 노란 모래사장이어야 할 육지는 달빛인지 물빛인지, 꽃을 피운 듯 화사하기만 하다. 전쟁통이란 게 믿기지 않는 그림은 김환기(1913∼1974)의 ‘달밤’(1951). 그 빛나는 서정성을 먼저 알아본 이는 시인 김광균(1914∼1993)이다. 자신의 부산 사무실 뒷벽에 그림을 걸어뒀다고 했다.
#4. 1954년 시인 김상옥(1920∼2004)의 출판기념회. 우리에겐 참으로 애틋한 한 화가의 그림 이야기가 시로 읊어나왔다. ‘어디선가 게가 한 마리 기어나온다/ 눈을 부라리고 옆걸음질로 기어나온다/ 게는 거품 뿜는다 뿜은 거품은 공중에서 꽃이 된다/ …/ 이때 뜻밖에도 봉같이 생긴 수탉이 찾아와서/ 꽃으로 울리는 음악을 듣는다…’(김상옥 시 ‘꽃으로 그린 악보’). 시가 노래하는 그림은 바로 이중섭(1916∼1956)의 ‘닭과 게’(1954). 시가 화답인지, 그림이 화답인지. 그림은 그 출판기념회에 꺼내놨던 방명록에 그려졌다.
#5. 1955년 경북 왜관. 웃는 얼굴들이 보인다. 뭔가 즐거운 일이 있는 건가. 자전거를 탄 꼬마는 좋아서 고개가 뒤로 넘어갈 정도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그런 아이를 막고 있지만 희색의 얼굴빛은 감추질 못한다. 경직된 표정은 한 사람뿐. 오른쪽 옆 얼굴이 낯이 익기도 한 그이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이다. 그즈음 이중섭은 친구 시인 구상(1919∼2004)의 집에 얹혀 있었다.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 있던 시기다. 그해 1월 연 개인전이 돈으로 연결되지 못하자 가족과 재회할 거란 기대감이 절망으로 바뀌었던 터. 그림 ‘시인 구상의 가족’(1955)은 누런색을 띤 채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이중섭의 속마음을 그린 거다.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준 구상의 부자가 못내 부러워서.
△1930∼50년대 교류한 화가·문인 50여명 총출동
이 모든 장면은 고스란히 어느 한 시기를 가리킨다. 일제강점기, 그것도 식민정책이 패악을 일삼던 1930년대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암흑시대 혹은 절망시대다. 모두가 숨죽이고 음지로 스며들 거라 생각했던 막연한 추측은 와장창 깨진다. 꿈틀거리기를 멈추지 않은 수많은 화가와 문인의 흔적이 쏟아져 나온 덕이다. 그것도 그림과 글의 엄중한 경계를 넘나드는 끈적한 교류의 자취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새해 첫 기획전으로 내놓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바로 그 시절 문화예술계의 풍경을 ‘예술인의 교감·교류’란 서정적인 키워드로 묶어낸다.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관에 펼친 전시는 풍성한 볼거리로 그간 갇혀 있던 시선을 틔워 주는데. 회화 140여점, 시집·잡지 등 서지자료 200여점, 편지·사진·디지털문헌 등 시각자료 300여점을 망라했다.
600여점을 훌쩍 넘긴 규모와는 별개로 ‘희귀성’으로 관심을 끄는 작품이 즐비하다. 아직도 ‘최초’가 남아 있나 싶은 김환기의 ‘자화상’(연도미상)이 처음 공개됐고, 한묵의 ‘검은 생선’(1958),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라 나무’(1940s)도 미술관 조명 아래 드물게 걸렸다. 문학에선 백석의 유일한 시집 ‘사슴’(1936) 초판본이 유리관 안에 들어 전시장에 나왔고, 박종화의 연재소설 ‘금삼의 피’(1936)에 그린 이승만의 삽화 원본도 대중과 첫 눈맞춤한다.
무엇보다 전시는 그간 아름아름 친밀함이 전해진 화가와 문인의 관계를 집대성한 의미가 있다. 화가 구본웅·김용준·최재덕·이중섭·김환기, 시인 정지용·이상·김기림·김광균과 소설가 이태준·박태원 등이 그들이다. 그 끈끈한 ‘브로맨스’는 ‘이인행각’이란 부제를 걸고 전시장에 도드라지게 묶여 있는데. ‘가톨릭’을 매개로 정신성을 같이 추구했던 시인 정지용(1902∼1950?)과 화가 장발(1901∼2001), 1930년대 중반 한 신문사에서 함께 근무하며 시인과 삽화가로 우정을 과시했던 시인 백석(1912∼1996)과 화가 정현웅(1910∼1976), 일본 유학시절 품었던 낭만적 예술관을 조선의 옛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으로 번져 낸 문인 이태준(1904∼1970)과 화가 김용준(1904∼1967) 등. 그중 그나마 대중에게 익숙한 결합은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보인다. 1938년 문예지 ‘여성’에 시가 발표될 당시 배경그림을 그린 이가 정현웅이다. 우두커니 앉은 나타샤 앞으로 눈 덮인 밤길을 걷는 흰 당나귀를 그려넣었다. 정현웅은 한 신문사에서 늘 눈앞에 왔다갔다했을 백석의 얼굴을 그린 ‘미스터 백석’(1939)을 잡지 ‘문장’에 발표하기도 했다.
△시를 그림같이 그림을 시같이…경계 허문 예술인 교감
그렇다고 이들이 무 자르듯 단 한 커플의 화우·문우로 살았던 건 아니었다. “시를 그림과 같이, 그림을 시와 같이”(김광균이 쓴 “1930년대의 시는 음악보다 회화이고자 하였다…”에서 끌어낸 대목. ‘30년대의 화가와 시인들’ 1982) 쓰고 그렸던 인물들이 ‘따로 또 같이’ 헤쳐 모인 복합적 관계망을 보이는데, 시인 김광균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김만형·오장환·이중섭·구상·이쾌대·진환·서정주·김환기·이봉구·조병화 등이 또 그들이다. 동료의식과 시대정신은 공유하되 뚜렷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굳이 김광균이 중심인 이유는 따로 있다. 김환기의 ‘달밤’이 그랬듯 김광균은 가난한 후배 화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 사주며 생계를 도왔던 거다. 이번 전시가 찾아낸 최대 성과 중 하나인 월북작가 최재덕(1916∼?)이 그린 ‘한강의 포플라 나무’도 한때 김광균이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주의자가 꼬투리를 잡는다면 ‘총·칼 앞에 펜과 붓만 들이댄 나약한 무리’들일 수도 있다. 술집과 다방을 전전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탄식하고 새 시대가 오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이들이 지킨 글과 그림, 지적 연대감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척박한 시절을 견뎌낼 창구까지 잃었을지도 모를 일.
자칫 탁월한 예술가들의 개인기 잔치처럼 보일 수 있는 대목을 애써 잘 눌러냈다. 튀지 않은 호흡으로 50여명 예술가에게 고르게 할애한 수고가 읽힌다. 다만 전시 말미 대거 배치한 김환기의 1970년대 ‘전면 점화’는 과욕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덕분에 숨어 있는 귀한 장면을 찾아내는 건 전적으로 관람객의 ‘즐거운’ 몫이 됐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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