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로 쓰고 맨발로 지워.. 'ㄱ' 향한 달팽이걸음
그것을 쓰기 전까지 모든 것은 미완(未完)이었다.
한국의 1세대 전위미술가 이건용(79)씨가 전시장 바닥에 검은 종이를 깔기 시작했다. 8m 남짓 이어진 하드보드지(紙) 위에서 그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짓단까지 걷어올렸다. 관람객이 모두 빠져나간 6일 오후 7시, 종이 위에 쪼그려앉은 이씨는 분필을 쥔 채 본인 팔의 가동 범위만큼 갈지자 선을 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전매특허 ‘달팽이걸음’ 퍼포먼스다. 팔이 선을 그으면, 뒤따르는 발이 그 선을 지웠다. “쓰고 지우는 상황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분필은 지워짐을 전제한 매체다. 우리는 적고 또 무수히 폐기한다. 그 과정이 더 훌륭한 발상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한글 창제”를 은유한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여한 이씨는 당초 추상화 한 점을 출품했으나, 그것은 사실상 미완성이었다. “퍼포먼스를 통해 비로소 의미가 채워진다”고 했다. 벽에 걸린 그림을 향해 뻗어나가는 종이 위에서 이씨의 몸은 10여분간 전진했다. 분필이 종이에 닿는 소리와 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일치하기 시작하자, 심박처럼 좌우 왕복 운동하던 선이 점차 ‘ㄱ’의 형태로 변모했다. 분필 세 자루를 갈아치우며 ‘ㄱ’이 명료해졌다. 종이 귀퉁이에 나머지 한글 자모(字母)를 써 내려간 작가는 마지막에 ‘한글 달팽이걸음’이라고 제목을 적었다. “그림은 몸에서 나오고, 한글 역시 몸의 구조를 반영한다. 그리는 것은 곧 쓰는 것이다.” 퍼포먼스의 결과물은 이르면 9일부터 관람객을 만나게 된다. 전시는 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미술단체 ‘ST’(공간과시간)를 이끌며 한국 아방가르드 운동을 적극 전개한 이건용은 특히 작가의 ‘신체’를 창작 활동의 본거지로 삼아온 대표적 사례다. 당초 그가 먼저 이번 전시에 출품한 것은 그림(‘바디스케이프 76-1’)이었다. 캔버스를 마주 보고 그리는 일반적 회화 제작 방식 대신, 자신의 키 높이(170㎝)로 맞춰둔 캔버스 뒤편에 선 채 화면 앞으로 붓을 뻗어 팔 닿는 범위까지만 물감을 칠했다. 그의 그림은 몸 자체다. “캔버스 천을 다섯번 접어가며 내 팔이 닿는 궤적 안에서 붓질을 거듭했다. ‘신체의 풍경’으로 번역 가능한 그림 제목처럼, 언어도 신체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내 ‘신체 드로잉’은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 그림을 ‘글을 쓴다’는 마음으로 그렸다.”
1970년대부터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이 같은 ‘신체 드로잉’과 1978년 시작한 ‘달팽이걸음’ 등의 퍼포먼스를 펼쳐왔다.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이씨는 지난해 미국 미술 매체 아트시(Artsy) 선정 ‘지금 주목해야 할 예술가 35인’에 한국인 유일 이름을 올렸고, 내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특별전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ㄱ의 순간'은 사유의 순간일 수도, 행위의 순간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 순간이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한글은 탄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靈)을 지녔으나 동시에 신체로서 이 세계를 산다. 우리가 지금 코로나로 인해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만남’이라는 우리말을 가장 좋아한다.” 그림과 퍼포먼스가 만나 비로소 완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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