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가치외교 협조하면서 한반도 평화구축 요구해야"
[경향신문]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69)를 만난 지난 4일은 마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약 보름만에 한·미 정상통화가 이뤄진 날이었다. 30여분의 짧은 통화 결과를 전하는 청와대 발표문은 꼭 바이든 시대 한국 외교가 받아든 ‘시험지’ 같았다. ‘포괄적 대북전략’부터 한·미동맹 업그레이드, 한·일관계와 한·미·일 협력, 미얀마 문제·기후변화 등 글로벌 이슈 대응까지, 하나같이 풀기 간단치 않은 문제들이다.
노무현 정부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윤 교수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에 발맞춰 “외교전략 재조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미·중 갈등 국면에서 다자주의 형식을 띤 미국의 ‘요청’에는 협조하되, 역으로 미국에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해 보다 적극적 태도로 나서달라”고 요구하라는 의미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움직여야 한반도 항구적 평화가 가능하다”면서 외교적 노력도 강조했다.
‘미·중 갈등과 한국의 대응전략’은 윤 교수가 다음달부터 1년간 미 하버드대 벨퍼센터에 머무는 동안 천착할 화두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이후 매일 자택 인근의 산을 두 시간씩 오르게 됐다는 그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단계적 비핵화 이행 ‘사찰’
북의 자발적 협조 필요한데
북·미 신뢰 없이는 불가능
-문재인 정부가 임기 1년여 남은 상황에서 바이든 정부가 출범했다. 한반도 상황에 미칠 영향이 관심사다.
“미 행정부가 시작한 대북정책 리뷰는 통상 4-5개월 걸릴 수 있다. 그동안 북한이 잘 기다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바마 정부에서도 공직을 맡았던 바이든 정부 많은 담당자들도 ‘전략적 인내’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아는 것 같다. 따라서 전략적 인내와는 다른 접근법을 추구할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에 북한 핵문제에 대해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를 자제하고 있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유예하기로 한 것으로 여긴다. 만일 바이든 정부가 시간을 오래 끌거나 북·미 간 합의를 무시한다면, 양측의 인식 격차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정부는 2018년 싱가포르 합의를 출발점으로 삼자는 입장이다. 바이든 정부가 과연 싱가포르 합의를 인정할까.
“싱가포르 선언의 세 개 조항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평화체제, 비핵화 등 핵심 사안에서 방향을 제시했다.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의미는 있다. 그러나 트럼프에 깊은 반감을 갖고 있는 바이든 정부가 싱가포르 합의에서 시작하지 않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바이든 ‘민주주의 동맹’ 강조
한국에 요구사항 많아질 것
부응하되 협조 이끌어내야
-바이든은 비핵화 협상에 어떻게 접근할 것으로 전망하나
“협상 방식과 접근법에서 트럼프와는 차이를 보일 것이다. 바이든은 다자주의를 강조하고 있고, 북핵 문제에서 중국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하다. 중국까지 포함한 다자 틀에서 이란핵협정(JCPOA) 방식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다. 관건은 북한이 이란처럼 충분히 사찰에 협조할 지, 다자협상 구도를 찬성할 지 여부다. (내용적으로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가 바람직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보고, 최종 목표는 완전한 비핵화로 하되 군비통제 성격으로 잠정합의를 맺으려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 입장에서 당분간 북한은 핵보유국이고, 핵을 이고 살아야하는 데서 오는 안보 차원의 불안요인이 증가한다. 그 불균형을 상쇄하는 문제가 국내적 논란이 될 것이고, 일부에선 핵개발을 주장할 수 있다.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가 논의 주제가 될 거다.”
과거 6자회담 사례에서 보듯이 북핵 다자 협상의 열쇠도 결국 북·미가 쥐고 있다. 윤 교수는 “미·북 사이 조정과정에서 한국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바이든 정부가 선호할 것으로 보이는 ‘상향식(바텀업)’ 방식에 대해선 “실무협상을 충분히 하고 정상이 만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협상팀에게만 맡기면 교착에 빠졌을 때 더 이상 진전을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며 “‘바텀업’과 ‘톱투바텀(톱다운)’을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협상이 재개된다면 북·미가 어느 수준에서 합의할까.
“예측은 힘들지만, 기본적으로 부분적 핵능력 감축과 부분적 제재완화를 맞교환하는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추가적으로 부분적 대북 안전보장조치가 있을 수 있는데, 부분적 맞교환일 경우엔 연락사무소, 종전선언 등이다. 어느 수준이 됐든 간에 비핵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려면 북·미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고는 어렵다. 단계적 비핵화 이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찰이다. 사찰이 제대로 되려면 북한 당국이 자발적으로 협조해야 하는데, 상호 신뢰가 어느정도 조성되지 않고는 힘들다. 실질적 비핵화 이행을 위해서도 북·미 간 정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8차 당 대회에서 핵무력 고도화를 선언한 북한을 협상에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
“바이든이 어떤 대북정책과 협상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제재를 빨리 해제해야겠다는 욕구를 갖고 있다고 본다. 코로나 국경 봉쇄로 인한 경제적 타격도 상당하다. 자력갱생이 현실적으로 오래 끌고 갈 전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하노이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제재 해제 대가로 영변을 꺼낸 것을 보면 ‘이도 저도 싫고 핵무장만 하겠다’는 건 아닌 것 같다. 미국이 적절한 인센티브와 압박을 동시에 구사하면서 적극적으로 북한 문제에 매달리면 가시적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편이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는 비핵화 비관론이 압도적이다. 대다수는 북한이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김 위원장의 최우선 목표는 정권 유지이고 그 때문에 핵개발을 고집했지만, 핵개발 비용이 정권 안정성 측면에서 판단한 이득과 비교해 계산이 맞지 않으면 다시 생각할 수도 있다. 핵보다 우선순위는 정권 유지다.”
미·중 갈등 심화되는 상황
‘전략적 모호성’만으론 한계
할 수 있는 것 선 그어야
-한·미관계는 전임 정부에서보단 안정적일 것으로 관측된다.
“트럼프는 동맹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주요 관심사가 돈 문제였다. 한국 입장에선 오히려 선택지가 많았고, 자율적 행동 반경이 넓었다. ‘민주주의 동맹’을 강조하는 바이든은 가장 성공한 동맹인 한국에 대한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큰 만큼 요청도 클 거다. 동맹 유지 차원에서는 안심이 되지만, 미국 측 요청이 많아질 것이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전략적 모호성’만 갖고는 힘들어졌다. 한반도 평화구축이라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려면 어느 정도 미국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신뢰를 얻고, 그들이 우리에 협조하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윤 교수는 ‘민주주의 정상회의’ 등 가치외교와 글로벌 협력 분야에서 “미국과 원칙적으로 함께 가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미·중의 입장이 정면충돌하는 곳 중 하나가 한반도”라며 “외교 방향과 관련 분명한 원칙을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칙이 없으면 (미·중 간) 현안이 생길 때마다 양쪽에서 압박을 받거나 자칫하면 양쪽의 불신을 받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다.
-미국 못지않게 중국도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한다.
“중국과의 관계설정은 큰 도전이다. 중국의 기본 전략은 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가진 국가가 되겠다는 것이다. 한반도, 가능하면 일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밀어내려 하고, 그런 맥락에서 한국을 다루며 한·미동맹 약화를 시도해 왔다. 중국에는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인 이상 민주주의 외교에 동참할 수밖에 없고, 국민들도 이를 원한다고 명확히 밝혀야 한다. 대신 중거리미사일 배치 등 중국을 군사적 타깃으로 삼는 것은 이제까지 그랬듯이 하지 않겠다고 설명해줘야 한다. 미·중 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하기 힘든 것을 선을 그어서 밝혀야 한다.”
-바이든도 정상 통화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언급했다. 한·일 갈등 해법은.
“바이든이 한·일협력을 강조한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고, 앞으로 더 강조할 거다.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은 국내적으로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동맹인 한일이 아등바등 싸우는 것은 중국을 의식하면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거다. 한·일 갈등 해결은 정치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사법부 판단은 그대로 존중하더라도 (판결에서) 파생되는 여러 어려움을 우회하는 정치적 해법이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 현실이 암담하다. 올해 2018년 평창올림픽 때와 같은 반전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까.
“마련됐으면 좋겠다.(웃음) 그런데 남북 화해협력이 잘 된 시기를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북미관계가 좋았던 때다. 1998~2000년처럼 예외적으로 남북, 북미관계가 좋았을 때의 특징은 클린턴-김대중 정부간 대북정책 공조가 잘 이뤄졌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남북관계가 유지는 됐지만 조지 W 부시 정부의 강경 입장으로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긴 역사를 보면 한반도 평화구축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움직여야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당장 남북관계도 개선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미국을 움직여 북한 문제에 새로운 접근법으로 나아가게 할 지를 고민해야 한다. 코로나 상황이 좋아져서 도쿄올림픽이 열리고 남북미 정상이 만나 대화 물꼬가 트이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바이든 정부가 톱다운 접근을 적극 지지하지 않으니 보다 근본적으로 미국을 움직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미국을 움직여라’는 윤 교수의 조언은 단지 미국과의 공조 혹은 설득을 주문하는 차원은 아니다. 그보다는 40여년 국제정치학을 파고든 학자이자, 한·미동맹 격변기에 외교정책을 결정·집행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통찰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한을 품어내려면 미국을 움직여야 하는 강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그걸 보지 않고 미국이냐 북한이냐, 자주냐 동맹이냐, 이분법으로 생각하면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는 “한·미 간 불신이 커지면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힘들어진다”며 “미 행정부와 의회, 언론, 싱크탱크, 학계, 지방정부를 상대로 총력적 외교를 펼쳐야 할 때”라고 말했다.
-총력적 외교를 펼치기에는 우리 내부에서부터 갈라져있는 것 같다.
“그렇다. 자꾸 독일 사례를 들게 된다. 물론 독일은 전쟁도 없었고 이념 갈등도 우리만큼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1982년 헬무트 콜 총리가 기민당 연립정부를 수립할 때 사민당 정부의 동방정책을 물려받았고, 20년 동안 우리 식으로 말하면 화해협력정책이 지속됐다. 초당적 대북정책과 함께 합리적이고 원칙있는 (북한) 포용이 중요하다. 북한이 글로벌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장 논리나, 비핵화, 인도주의, 보편 규범 등의 가치를 서서히 수용하도록 이끄는 방향으로의 포용이어야 한다.”
-미 의회 청문회까지 추진되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정부가 미국과의 협력, 가치외교에 적극 참여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면 (법을) 문제시하려는 일부의 동력이 상당히 약화될 것으로 본다. 정부 하기에 달려있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서 보편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인식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수록 어려워진다.”
■윤영관
노무현 정부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국제정치학자다. 25년간 몸담았던 서울대에서 2015년 정년 퇴임한 뒤 저서 <외교의 시대>나 강연을 통해 외교·안보 분야 제언을 하고 있다. 평생의 화두인 한반도 평화와 더불어 첨예한 미·중 갈등 속에서 한국과 같은 ‘소국’의 대응 전략을 고민 중이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윤 교수는 다음달부터 연말까지 하버드대 벨퍼센터에 머물며 미·중 갈등과 한국의 대응전략을 연구할 계획이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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