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신세계가 '디지털 경쟁'에 뒤쳐질 수 밖에 없는 이유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롯데홈쇼핑에서 롯데상품권을 사용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였다. ‘쇼핑 계열사니까 당연히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한참을 빗나갔다. 불가능은 아니지만,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홈쇼핑 관계자의 답은 이랬다. “지류 상품권을 등기로 보내주시면 되긴 한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는 미안했던지 한마디 덧붙였다. “좀 구식이죠. 지류 상품권에 구멍을 내 소멸 처리를 해야해서…”
호기심은 점점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롯데쇼핑 등 유통 대기업들의 최대 화두가 온·오프라인 통합 아니었던가. 국가가 발행한 화폐도 점점 모바일 속 ‘디지털 숫자’로 변하고 있는 마당에 온라인에서는 사용 못하는 상품권이라니, 그 배경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롯데쇼핑의 설명은 단순했다. 회사 관계자는 “보안상의 이유”라고 말했다. 상품권 고유번호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온라인화(化)가 가능하긴 하지만, 자칫 고유번호를 가린 스크래치를 위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백화점 역시 지류 상품권을 포인트 등 디지털 화폐로 전환하는 게 불가능한데, 마찬가지로 보안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신세계만 해도 지류 상품권을 ‘쓱머니’로 전환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마트 관계자는 “조폐공사에 의뢰해서 홀로그램 보안 및 스크래치 보안 강화를 위한 기술을 개발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나마 신세계가 조금 낫긴 하지만, 신세계 역시 ‘디지털 지체’ 현상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모바일로 신세계 상품권을 구매한다고 가정해보자. 신세계 계열 온라인 쇼핑몰인 SSG닷컴에 올라와 있는 상품권의 품목명은 ‘신세계상품권 모바일교환권’이다.
예컨데 10만원을 지불하고 살 수 있는 건 백화점이나 이마트에서 지류 상품권으로 바꿀 수 있는 ‘교환 권리’이지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유가증권’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마트마다 교환권을 지류 상품권으로 교환할 수 있는 키오스크가 설치돼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선물받은 신세계 모바일 상품권을 SSG닷컴에서 사용하려면 가까운 신세계 계열 매장을 찾아가 지류 상품권으로 교환한 후, 이를 다시 쓱페이앱에서 ‘머니’로 전환하는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게다가 신세계그룹은 계열사별로 별도의 ‘모바일 금액권’을 발행하고 있다.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이마트’를 입력하면 신세계 상품권 외에 ‘이마트 금액권’, ‘디지털 상품권’ 등이 검색되는 식이다. 각각 이마트와 편의점 이마트24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로, 소비자들 입장에선 신세계 전 계열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각사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 등 유통 대기업 모두 상품권 사용에 관한 한 온·오프라인 통합은 물론, 계열사 통합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유통 대기업들은 지류 상품권 발행을 통해 상당한 혜택을 누려왔다. 추석이나 설 등 명절용 선물의 으뜸으로 꼽히는 게 백화점 상품권이다. ‘현금은 아니지만, 현금처럼 통용되는’ 상품권만의 독특한 가치 덕분이다. 1999년 정부 허가제가 사라진 이후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 등 국내 유통 대기업들이 발행한 상품권 시장 규모는 연간 5조원(작년 기준 추정치)에 육박한다.
유통업체 입장에서 상품권 발행에 따른 가장 큰 이점은 손 쉽게 대규모 자금을 융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면액에 따라 50~800원의 인지세만 내면 별다른 비용없이 조(兆) 단위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채권을 발행하거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금융 행위의 대체라고 생각해보면, 엄청난 이자 비용을 절감하는 셈이다. 아주 일부이긴 하겠지만, 상품권 소지자들이 해외 이주 등 불가피한 이유로 유효 기한 내에 상품권을 사용하지 못할 경우 발행사로선 ‘의도하지 않은’ 이익을 누릴 수도 있다.
유통 대기업들의 지류 상품권 집착에 대해 전문가들은 네이버쇼핑, 쿠팡 등 ‘디지털 유통’과의 치열한 경쟁을 꼽는다. 유통업체 관계자는 “상품권을 바꾸러 매장을 방문하면 자연스럽게 추가 쇼핑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며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매장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에서 상품권 정책을 급격히 디지털로 전환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 경쟁이 심하다보니, 거꾸로 오프라인에 집착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직원들조차 헷갈리는 유통 대기업들의 복잡한 상품권 정책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지체 현상이다. 문제는 이런 지체의 시간이 경쟁력 하락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네이버의 ‘포인트 활용법’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과연 유통 대기업들에 ‘지체해도 될 시간적 여유’가 있을까 의심마저 든다. 네이버는 쇼핑, 웹툰, 엔터테인먼트 등으로 콘텐츠 영역을 확대하면서 ‘네이버 화폐’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쇼핑만 해도 자사 스마트스토어를 비롯해 현대백화점 계열의 H몰, AK몰, CJ몰, GS숍 등에서 사용할 수 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지난달 전격 회동하며 협력 방안을 모색했는데, 협력 분야로 포인트 공유가 꼽힐 정도다. 네이버포인트로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 이마트24 등에서 쇼핑할 수 있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네이버 관계자는 “오프라인에서도 네이버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휴처를 계속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우리의 고객은 영구히 변했다”며 “변화된 고객의 요구에 광적으로 집착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겪으며 비대면 소비의 경험이 습관으로 굳어졌으니 이에 상응하는 경영 전략을 짜야한다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 온·오프라인 통합은 반드시 가야할 길이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신동빈 회장도 지난달 사장단 회의에서 “(오프라인 쇼핑에서 거뒀던) 과거의 성공 경험을 과감히 버리라”고 강조했다. 유통 대기업들의 종이 상품권 집착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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