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이라고 말하면 하나원 보내주는 줄 알았어요"

김종철 2021. 2. 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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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종철의 여기][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간첩 누명 벗은 탈북자 홍강철씨
2013년 입국 135일 독방 조사받아
강압과 "북 가족 데려다준다" 꾐에
국정원 요구대로 "간첩이다" 허위자백
뒤늦게 속은 것 알고 진실투쟁 끝 무죄
북한 체제에 불만 가득했던 사람
주민 탈북 돕고 송금 전해주기도
"사람 목숨이 제일이라는 생각에서
먹고살려고 월경하려는 사람 도와"
“안 겪어보면 모릅니다. 예를 들면 왜 탈북했느냐는 물음만 가지고 일주일 넘게 조사를 해요. 했던 얘기 또 하게 하면서, 제가 사실대로 얘기하면 ‘말 같은 소리 좀 하라’고 윽박지르죠.” 홍강철씨는 2013년 8월 입국한 뒤 탈북자들을 조사하는 합동신문센터에서 135일 동안 독방에 갇힌 채 조사를 받은 끝에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했다. 그는 1심, 2심에 이어 지난해 연말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홍씨가 지난달 2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간첩으로 조작된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저는 북한군 보위사령부(남한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해당하는 군 방첩 기밀부대)에서 파견된 간첩입니다’라고 자백했다. 자필로 쓴 반성문까지 있다. 수사가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정보원 등 수사기관이 뽐냈던 ‘자백 간첩’은 1심, 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났다. 그가 중앙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숱하게 쓴 진술서와 반성문뿐 아니라 검사 앞에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마저 증거능력이 없다고 배척됐다. 진술거부권과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형식적으로만 알려주고 작성한 조서는 위법이라는 획기적인 판례다. 물론 주요 피의사실이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건 실체에 대한 판단도 내려졌다. 홍강철(48)씨 사건은 수사기관이 생사람을 어떻게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지, 약자의 인권이 얼마나 쉽게 침해당하는지를 보여준다. 지난 22일 오후 홍씨(이하 호칭 생략)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지난해 12월24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이 나왔는데 기분이 어땠어요?

“허무하더라고요.”

―기쁘지 않고요?

“그다지 기쁘지 않더라고요. 말도 안 되게 간첩으로 조작됐던 것도 억울한데 재판이 너무 길었잖아요. 2014년 9월에 1심 무죄가 난 뒤에 대법원 판결까지 6년이 훨씬 넘게 걸리면서 진이 완전히 빠졌거든요. 대법원 판결을 보면 1, 2심에서 바뀐 게 없는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끌었는지 모르겠어요. 좀 허무하기도 해요.”

북한 법처럼 쉽게 생각하고 허위 자백해”

함경북도 무산에서 살았던 홍강철은 2013년 6월 북한을 탈출해 중국과 타이(태국) 등을 거쳐 그해 8월 한국에 들어왔다. 입국 직후부터 바로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135일 동안 독방에 갇힌 채 조사받은 뒤 이듬해 2월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고법 판결(2016년 2월)로 따져도 거의 5년 가까이 걸렸는데 그동안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었나요?

“취직을 할 수 없어서 생활이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가장 힘든 것은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었어요. 원래는 딸아이 둘을 데려오고 동생네 식구도 데려올 계획이었는데 감옥 가고 재판 받는 바람에 계획이 다 흐트러졌죠. 게다가 제 소식이 고향에 알려져서 가족들이 보안소에 끌려가 혼쭐이 나고 반역자의 자식들이라고 구박을 당했다고 해요.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딸들이 산전막이라고 여름철 농사짓기 위해서 산에 만든 허름한 집에서 한때 살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괴로웠어요.”

홍강철씨는 유튜브 방송 ‘왈가왈북’과 탈북민 단체 ‘통일중매꾼’ 활동을 하면서 북한 바로 알리기와 남북 화해 협력에 앞장서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그는 한국에 오기 위해 동남아에 있을 때 자신이 간첩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 그의 탈북을 도와주기로 했던 브로커 유아무개씨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서는 홍강철이 자신을 유인해 납치하려 했다면서 당국에 간첩 신고를 했다. 그 사실을 유씨에게 들은 다른 탈북자가 전화로 알려줬다. 홍강철은 사실대로 말하면 오해가 풀리겠지라는 생각에 예정대로 입국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이 시시티브이(CCTV)로 24시간 감시되는 독방에 갇혀 ‘독 안에 든 쥐’가 됐다. 그는 여섯달 동안 조사관들 말고는 아무도 못 만났으며, 달력이 없어 날짜 가는 줄도 몰랐다. 낮에 조사관과 입씨름을 마치면 저녁에 그 내용을 토대로 진술서를 반복해서 쓰는 “숙제”를 해야 했다. 2차 조사 때 쓴 진술서만 1000장이 넘었다.

―물리적인 고문은 없었는데도 허위 자백을 했는데요.

“안 겪어보면 모릅니다. 예를 들면 왜 탈북했느냐는 물음만 가지고 일주일 넘게 조사를 해요. 했던 얘기 또 하게 하면서, 제가 사실대로 얘기하면 ‘말 같은 소리 좀 하라’고 윽박지르죠. 저는 제가 의심받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1차 조사 진술서에 숨김 하나 없이 동거 경력 등 개인 프라이버시까지 다 썼어요. 그런데 국정원 조사관들이 그런 치부를 들추면서 ‘쓰레기 같은 새끼’라고 몰아붙였어요. 정말 치욕스럽고 억울해서 죽고 싶은 심정까지 들었지만, 북에 있는 딸들 생각에 수없이 울기만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국정원 간부들이 와서 그래요. 김현희(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이야기를 하면서 ‘야, 115명을 죽인 김현희도 국정원 직원하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데 너는 한국에 와서 실제로 한 일이 없지 않냐, 그러니 인정하고 빨리 가라. 쉽게 가자’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저들 요구대로 해주면 국정원 직원들에게는 무슨 포상이 주어지겠지만, 나는 하나원으로 그냥 보내주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죠. 그때 한국 법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북한 법을 생각하고, 차라리 시키는 대로 인정하고 빨리 나가자고 생각했던 거죠. 북한 법은 증거가 없으면 내 진술 하나만 가지고는 절대로 유죄가 안 나요. 너희들이 나를 간첩으로 만들어도 내가 법정에 나가서 아니라고 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어요.” ―그 뒤에는 요구하는 대로 다 했나요?

“아니죠. 저녁에 진술서를 쓰고 자리에 누우면 별의별 생각이 다 나죠. 무엇보다 내일 다시 조사받을 일이 끔찍한 거예요. 들어보지도 못한 일을 조사관이 힌트 주는 것에 따라서 계속 만들어내야 하고 기억을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밤새 뒤척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진짜 바보처럼 사네’라는 생각이 들고, 다음날 아침에 조사관을 만나서는 어제 말한 거 다 거짓말이라고 번복했죠. 그러면 또 싸움이에요. ‘이 새끼, 일어나라’고 욕하고, 저는 아닌 걸 아니라고 하지 어떡하냐고 대들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간부가 또 들어왔어요. 김치 등 제가 좋아하는 먹을 것을 잔뜩 가지고 와서 먹게 하고는 ‘우리는 평양에 있는 사람들도 다 데려다준다. 너네 가족은 국경에 있지 않나. 그러니까 일이 잘 끝나면 가족 문제도 해결해주겠다. 인정하고 쉽게 가자’고 해요. 조사받을 때 조사관이 슬쩍 지금 브로커 비용이 제가 올 때보다 배로 올라서 한 사람당 최소 1200만원은 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계산해보니 우리 가족 다 데려오려면 최소한 1억원은 있어야겠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간첩이라고만 하면 가족을 책임지고 데려다주겠다니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그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내가 간첩이라고 말해도 신문에 안 내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내일부터는 번복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죠. 그게 2013년 11월 초쯤이었어요.”

문익환 목사는 오래전에 죽었으니 빼자”

홍강철 간첩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에 대한 간첩 조작 사건의 1심 무죄 선고(2013년 8월22일)가 나온 직후였다. 유우성이 간첩으로 조작되는 핵심적인 근거였던 동생 유가려씨의 허위 자백(“오빠는 간첩”)도 합동신문센터 독방에서의 6개월 강압 조사 결과물이었다.

―어떤 식으로 진술이 짜 맞춰졌나요?

“간첩의 임무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조사관이 ‘북에서 무슨 임무 받고 왔어?’ 묻죠. 머뭇거리면 ‘야, 종북세력들 어떻게 하라고 한 거 없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네, 종북세력들 동향 탐지하라고 그랬습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종북세력이라는 게 누구야?’라고 묻고, 저는 북한에 있을 때 알고 있던 남한 사람들인 임종석, 임수경, 문규현 신부님, 문익환 목사님 이름을 댔죠. 그랬더니 ‘야, 문익환 목사 죽은 지 언젠데, 너 그거 몰랐어?’라면서 ‘문익환 목사는 빼자’고 하데요. ‘알았습니다’라고 했죠. 그렇게 오고 간 대화 내용을 저녁에 쓴 것을 다음날 조사관이 보더니 ‘야, 북에서 종북세력이라는 말을 해?’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서는 그렇게는 안 부를 거잖아요. 한참 생각하다가 민주세력이라고 써서 냈어요. 그걸 윗사람들이 보고는 북에서는 그런 용어 안 쓴다면서 다시 받으라고 한 모양이에요. 조사관이 ‘야, 북에서 민주세력이라고 안 하고 통일애국인사라고 한다는데’라고 하길래 통일애국인사들이라고 표현을 바꿨죠. 그런 식이었죠.”

―거짓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어요?

“2014년 2월11일 국정원을 떠나면서 저는 하나원으로 가거나 적어도 국정원에서 관리하는 또 다른 안가로 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울구치소 철창으로 가는 거예요. 그 순간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족들이라도 데려오기 위해서는 국정원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거기에 ‘국정원 밥 먹고 14킬로그램 살찐 간첩’이라며 제 얘기가 기사로 나왔어요. 신문에 안 낸다더니 이렇게 비열하게 이용해먹는구나, 북에 있는 가족들도 다 틀렸구나 싶어 국정원 데려오라면서 감방 문을 발로 차고 난리쳤죠. 그래서 국선변호인한테 면담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고, 민변의 장경욱 변호사님을 만나게 됐죠. 영장심사 받을 때 처음 국선변호인을 만났는데 국선변호사는 국가 편인 줄 알고 믿지를 않았거든요.”

홍강철씨가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받을 때 조사관들이 애연가인 자기 앞에서 담배를 일부러 피우면서 괴롭힌 ‘담배 고문’을 설명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북한사회에 대한 일방적 매도 막고
남북 평화·화해 위한 중매꾼 되고파”
“미, 전단금지 관련 내정 간섭 말고
청문회에 나를 증인으로 불러라”

홍강철은 북에 있을 때 탈북하려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남한에서 보내오는 탈북자들의 돈을 북한 가족에게 전달해주는 일을 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중개수수료를 훨씬 저렴하게 받았고, 정확하게 일처리를 했기에 ‘고객’이 많았다. 그는 또 북한 내부의 정보를 남한에 전해주는 전령사 구실도 했다. 그를 간첩이라고 신고했던 유씨가 전화로 북한 내부 사정을 물어오면 알아본 뒤 말해줬다. 그렇게 나온 생생한 북한 정보는 탈북 지식인들의 단체인 ‘엔케이(NK)지식인연대’를 통해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덕분에 유씨는 ‘엔케이지식인연대’의 정보팀장이 됐다.

―북한에서는 오히려 반체제 인사였네요.

“북에 있을 때는 불평불만분자, 범법자였어요. (웃음) 늘 북한 사회 체제에 대한 반감이 있었단 말이에요. 제가 학력(강건종합군관학교·초급장교 양성 기관)은 남보다 빵빵한데 당 간부가 못 됐잖아요. 친구들은 다 하는데 저만 못 하니까 늘 불만이었죠. 싸움도 잘해서 제 별명이 모범깡패였어요. (웃음)”

―공부도 잘했고, 가족 중에 힘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왜 당 간부가 안 됐어요?

“어머니 때문에 그랬어요. 어머니가 중국에 나갔다가 파룬궁 수련을 하면서 귀국을 안 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앞길이 막혔죠. 어머니가 지금도 자신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됐다면서 스스로 질책하죠.”

중국에서 생활하던 어머니는 2016년 아들이 있는 한국에 입국했다. 아버지는 1997년 북한에서 작고했다.

―출셋길이 막혀서 불만이 쌓였던 거군요.

“네. 그래서 돈이라도 벌어서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때부터는 북한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먹고살기 힘들다면서 중국에 좀 보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래, 사람 목숨이 중하지’ 하면서 도왔죠. 중국에 가면 굶어 죽지는 않거든요. 국경수비대에 있을 때는 밀수하는 사람들도 봐줬어요. 무엇보다 사람이 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죠.”

미 의회는 왜 청문회 박상학만 부르나”

그는 무산의 타워팰리스라고 할 수 있는 7층 아파트에 살았다. 이른바 공화국 영웅 등에게 나눠준 주택이지만, 밀무역업자나 골동품 장사꾼 등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북한에서 잘살았는데 왜 탈북을 결심했어요?

“결정적으로는 제 친구 한명이 보안서에 잡혀 들어가서 어쩔 수 없이 저를 통해서 송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불었어요. 체포령이 떨어졌다면서 친구들이 빨리 피하라고 저한테 말해줬어요. 일단 몸을 피한 뒤 무마할 수도 있었는데 더는 남아 있기 싫더라고요. 그때 제 집사람도 탈북자를 돕는 일을 하다가 보안서에 잡혀 들어가서 15년 형을 받았거든요. 이제는 이 땅에서 살기가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홍강철은 2016년 한국에서 만난 탈북 여성과 새 가정을 꾸려, 딸아이 하나를 뒀다. 간첩 혐의 때문에 취직이 안 돼, 요리사인 부인이 주로 생활비를 벌어온다. 그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틈틈이 유튜브 방송 ‘왈가왈북’, ‘새날’의 한 코너인 ‘오빤 간나 스타일’ 등을 통해 북한 바로 알리기 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또, 남북 화해와 협력에 앞장서는 탈북자 모임인 ‘통일중매꾼’의 대표를 맡고 있다.

―왈가왈북은 2019년 5월부터 시작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아이 백일잔치에 유영호(북한영화 전문가)씨가 왔다가 이런 방송을 할 생각이 없냐고 하더라고요. 종편이나 보수 유튜브 방송에서 북한에 대한 왜곡된 선전이 너무 많은 걸 보고는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가 제의해서 시작한 거죠.”

―통일중매꾼은 어떻게 만들었어요?

“박상학씨 등이 날리는 대북전단이 사회적인 문제가 됐을 때였어요. 대북전단 날리는 게 박씨 등의 돈벌이용이라는 제보를 받아 방송을 하고, 이런 내용을 국회에서 기자회견하면서 단체를 만들었죠. 평소 제가 강연을 다니면서 하는 말이 통일중매꾼이었어요. ‘우리 탈북자를 ‘먼저 온 통일’이라고 말하는데,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주선하는 중매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죠. 거기서 이름을 땄어요. 지금은 회원이 100명 정도예요.”

―지난해 12월 대북전단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뒤 국내 보수세력이 반발하고 있는데요.

“대북전단은 바람 방향 때문에 아무리 잘 날아간다고 해도 휴전선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밖에 접하지 못해요. 그러나, 대북전단 때문에 언제 북쪽에서 총포탄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야 하잖아요. 자칫 국지전이 벌어질 수도 있고, 그러면 군사분계선 주변의 주민이나 국군장병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잖아요. 전단을 날리는 사람들은 대가로 후원을 받아서 돈을 버는데 그들의 돈벌이가 여러 사람을 위험에 빠트려서는 안 되죠. 설령 전단이 날아간다고 해서 북쪽 사람들 생각이 바뀌나요. 북한에서 전단이 날아오면 우리 국민들이 그것을 믿겠어요? 안 믿잖아요. 북쪽 사람들도 똑같아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면서 미국 의회가 대북전단금지법 청문회를 열겠다고 하고 있는데요.

“웃기는 얘기죠. 미국 하원이 뭔데 우리나라 법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내정간섭을 합니까. 청문회를 추진하는 의원들에게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자기 배우자의 무릎을 다른 사람이 베고 있는 사진을 합성해서 집 대문에 뿌려도 가만히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또, 쿠바에서 미국을 반대하고 비방하는 삐라를 만들어서 날려보내면 당신들은 가만히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청문회를 하려면 박상학이나 이민복 등 전단 살포에 찬성하는 사람뿐 아니라 저처럼 반대하는 탈북자도 증인으로 불러야 공정한 거 아닙니까.”

―탈북자들은 보통 보수적인데, 탈북자 사회의 반응은 어때요?

“탈북자 중에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은 소수이지만, 그런 판단은 대부분 같아요. 옳고 그름은 우리도 안단 말이에요. 북한 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종편에서 나오는 북한 얘기를 보고는 대부분은 거짓말이 너무 도를 넘는다고 욕해요.”

“처음에는 ‘왜 한국에 와서 고생하나’라면서 후회도 많았지만, 지금은 새 가정도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어서 많이 나아졌어요.” 강요로 허위자백 간첩이 됐다가 최근 무죄 선고를 받은 탈북자 홍강철씨가 지난달 22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국정원이나 검찰, 조작 사과 안 해”

홍강철 무죄 선고가 나온 직후 국정원은 “티에프를 구성(팀장 박선원 기조실장)해 합동신문센터 조사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여부 등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받고 간첩으로 발표된 사람은 모두 14명이다. 유우성, 홍강철의 무죄 판결에 이어 이혜련(2013년 2월 입국)씨 등은 재심을 준비 중이다.

―무죄가 확정된 뒤 국정원이나 검찰에서 사과는 없었어요?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나요?

“국정원에 있을 땐 죽어도 내 땅에 가서 죽겠다면서 돌려보내달라고 했죠. 석방되고 나서도 처음에는 진짜 후회도 많이 했어요. 괜히 와서 고생한다고 말이죠. 지금은 많이 나아요. 집사람을 새로 만나 아이도 있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니까요.”

―우리 사회에 대해서 하고픈 얘기도 많을 것 같아요.

“억양이 좀 다르다고 해서 탈북자를 깔보고 불이익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탈북자들은 다 가슴에 아픈 상처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배고파서 오고,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정이 생겨서 오는 사람들이죠. 그런 마음의 상처를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품어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국정원 등 당국도 탈북자를 잠재적 간첩으로 보지 말고 인도주의적인 마음으로 안아주면 좋겠어요. 설령 탈북자 간첩이 있다고 해도 남한에 와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일반 탈북자 신분 가지고는 대한민국의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 엘리트에게는 접근도 못해요. 간첩은 잡아야겠지만, 만들지는 말아야죠.”

홍강철은 자신을 변호했던 박준영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끔 일을 돕고 있다. 경찰의 강압 수사와 고문에 살인자로 몰려 21년간 옥살이를 했던 ‘낙동강변 살인사건’(엄궁동 2인조 사건) 피해자의 재심 사건은 그중 하나다. 이 사건의 피해자 2명은 지난 4일 부산고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는 “뒤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지게 돼 내 일처럼 기쁘고, 뿌듯해요”라고 말했다.

[홍강철을 만든 시간들]

고향 무산: 2012년 외삼촌의 회갑잔치 때 기념사진을 찍었다. 뒷줄 가운데가 홍씨.
북한 탈출: 2013년 6월 압록강을 건너 북한 탈출에 성공했다. 탈북 당시의 모습.
유튜브 방송: 북한 바로 알리기 차원에서 2019년 6월부터 ‘왈가왈북’을 시작했다. 왼쪽은 유영호씨, 가운데는 탈북민 김련희씨.
평화운동: 2020년 7월 임진각 앞에서 대북전단 살포 저지 활동을 했다.
무죄 판결: 2020년 12월 대법원에서 간첩 혐의 무죄 판결이 났다. 가운데가 홍씨, 그 오른쪽은 장경욱 변호사.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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