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두뇌 대역' 키운 혁신의 아이콘 베이조스
‘천재’나 ‘개척자’, ‘혁신가’로 불리며 업(業)을 일궈낸 인물의 후계자 자리는 독이 든 성배(Poisoned Chalice)와 같다. 막대한 부와 영광이 보장되며 모두의 부러움을 사지만, 전임자를 뛰어넘기는 커녕 그대로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례를 봐도 수많은 대기업 오너 후계자들 중에서 ‘아버지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전세계 산업을 주도하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후계자였던 스티브 발머는 ‘창의력과 활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스티브 잡스의 후계자인 팀 쿡조차도 몇 년간 ‘애플을 망치고 있다’며 역적 취급을 받았다.
◇베이조스의 ‘두뇌 대역’
지난 2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또 한 사람의 후계자가 탄생했다. ‘아마존 제국’을 이뤄낸 제프 베이조스가 “올해 3분기에 아마존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내려놓고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면서 후임으로 앤디 재시 아마존웹서비스(AWS) 대표를 지목했다. 베이조스는 ‘혁신’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와 함께 ‘스티브 잡스의 진정한 후계자’로 평가 받는다.
1994년 시애틀의 창고에서 온라인 서점으로 시작한 아마존은 유통·물류·식료품·디지털콘텐츠·미디어·우주개발 등 진출하는 분야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아마존드(아마존에 의해 파괴되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지금은 전세계 온라인 쇼핑의 표준이나 마찬가지인 ‘정기 구독’, ‘초특급 배송’, ‘맞춤형 상품 추천’ 등도 모두 아마존이 주도했다. 베이조스는 ‘항상 창업 첫날처럼 일하라‘는 ‘데이(Day)-1 정신’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제국을 맡긴 앤디 재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뉴욕타임스(NYT)는 4일 “재시는 20년간 베이조스의 ‘두뇌 대역(Brain double)’으로 키워진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베이조스가 완전히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시가총액 1조7000억달러(약 1910조원), 직원수 130만명에 이르는 거대 기업 아마존을 맡겼다는 것이다. NYT는 “재시는 2002년부터 베이조스의 그림자가 됐으며, 그 결과 베이조스의 판단에 도전하거나 베이조스가 질문할 내용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됐다”면서 “20년간 베이조스에게 교육을 받아온 것”이라고 했다. 아마존 내부 인사들은 재시가 베이조스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은 물론 베이조스의 리더십을 아마존 내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인물로 꼽는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재시는 하버드대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재학 시절에는 하버드대 학생 신문인 ‘하버드 크림슨’ 기자로 비즈니스 분야를 담당하기도 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졸업을 앞둔 1997년 5월, 재시는 아마존에 합격했고 졸업시험을 본 지 3일 뒤에 아마존에 입사했다. 재시는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어떤 부서에서 일할지, 직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고 회고했다. 3주 뒤 아마존은 나스닥에 상장됐다. 시초가는 18달러였다(현재 아마존 주가는 3352달러).
◇베이조스의 ‘두뇌 대역’
재시가 아마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당시 베이조스는 인재 육성과 신사업 발굴을 위해 비서조직을 만들었는데, 재시는 그 중에서도 베이조스의 총애를 받았다. 베이조스가 중요한 미팅을 하거나 전화를 할 때, 이사회에 참석할 때, 해외 출장을 갈때마다 재시가 옆에 있었다. ‘베이조스의 그림자’로 불리게 된 이유다. 하지만 재시의 진짜 능력은 단순히 베이조스의 부관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분야를 앞장서서 개척하고 키우는 데 있다. 뉴욕타임스는 “재시는 그림자인 동시에 새로운 시장으로 진격하는 돌격대장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재시는 아마존을 콘텐츠 기업으로 만든 ‘아마존 뮤직’의 첫 제안자였다. 또 2003년 초고속 인터넷이 자리잡기도 전에 ‘클라우드(서버 임대)’ 사업을 구상했고 직원 57명을 뽑아 실천에 옮겼다. 당시 아마존 전체 직원은 5000명 수준이었다. 뉴욕타임스는 “2003년 아마존 고위 임원들이 베이조스의 집에 모여 클라우드 컴퓨팅을 검토했을 때, 그들은 클라우드가 아마존만 아니라 다른 기업에도 도움이 되는 비즈니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하지만 이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제시는 30번 이상 문건을 다시 작성해야 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클라우드 사업에 진출해 시장을 선점한 아마존은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아마존의 대표적인 캐시카우(수익원)로 꼽힌다. 이 밖에 재시는 아마존 멤버십 서비스인 ‘아마존 프라임’ 같은 신규사업이 이사회와 투자자의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베이조스를 도와 정면돌파를 이뤄냈다.
재시도 베이조스가 자신을 훈련시켰고, 그 덕분에 성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재시는 지난해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난 내가 아마존에 취업하기 전만해도 스스로 굉장히 높은 기준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내가 베이조스의 그림자가 됐을 때 그 기준이 충분히 높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베이조스의 유산 계승할 듯
아마존의 성공은 재시를 ‘아마존 최고의 월급쟁이’로 만들었다. 그는 2016년에는 베이조스보다 20배나 많은 3560만달러의 연봉을 받는 등 직원 수가 130만명에 이르는 아마존 내 최고액 연봉자이다.
아마존의 새 수장이 될 재시가 아마존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재시는 현재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도전해온 베이조스의 방식을 그의 ‘두뇌 대역’인 재시가 이어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재시는 4일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아마존이 최근 투자하고 있는 게임 사업에 대해 지지를 밝히면서 “몇몇 사업은 금방 성공을 거두지만, 그렇지 않은 사업들은 몇해가 걸리기도 한다. 나는 언젠가 (아마존 게임이)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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