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쓰지도 못하고 버리는 폐기량 최소화해야
의료 전문가 "접종 서두르기보다 철저한 사전 대비 필요"
(시사저널=노진섭 의학전문기자)
#1. 미국 오리건주 조지핀카운티 보건국 직원 등 20명을 태운 차량이 1월26일 고속도로에 갇혔다. 폭설로 교통사고가 발생해 고속도로가 폐쇄됐기 때문이다. 눈은 계속 내리고 차량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었다. 이 차량에는 다른 곳에서 백신 접종을 마치고 남은 모더나 백신 6회분이 실려 있었는데, 온도에 민감한 이 백신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6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백신을 폐기해야 할 위기에 처하자 의료진은 눈을 뚫고 자신들처럼 고속도로에 갇힌 자동차들의 창문을 하나하나 두드리며 백신을 맞을 사람을 찾았다. 결국 약 45분 만에 6명에게 남은 백신을 모두 사용했다.
#2. 1월29일 자정을 넘긴 시각, 수천 명의 사람이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의 UW메디컬센터로 모여들었다. 급한 마음에 잠옷 차림으로 달려온 노부부도 있었다. 그 병원에 가면 누구나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수 있다는 공지를 트위터에서 본 사람들이었다. 한밤중에 이와 같은 소동이 일어난 이유는 인근의 다른 병원에서 백신을 보관해 둔 냉동고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1600명이 맞을 수 있는 모더나 백신이 고스란히 실온에 노출된 것이다. 12시간 안에 사용하지 못하면 모두 버려야 할 상황이 발생하자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트위터에 긴급 접종 공지를 올렸고 30분 만에 예약이 완료됐다. 백신 유통기한을 1시간30분 남겨둔 새벽 3시30분에 백신을 모두 쓸 수 있었다.
접종기관 24시간 운영 등 해법 찾아야
코로나19 백신은 온도에 민감하다. 특히 한번 개봉한 백신은 실온에서 6시간 이내에 사용해야 한다. 이 시간을 넘기면 백신 효과를 담보할 수 없으므로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지난해 9월 국내에서 독감 백신이 실온에 노출된 후 백신 접종을 중단하고 백신을 전량 회수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 정부는 1월28일 코로나19 백신 접종 시행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개봉한 후 남은 백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다양한 노력을 통해 백신 폐기 최소화를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문구만 있다. 백신 폐기량을 줄이는 문제가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의사 출신인 신현영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우리도 미국의 사례처럼 폐기하는 백신에 대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백신을 계절성 독감 백신과 같은 시스템으로 관리하면 안 된다. 국민의 혈세로 사온 백신이니만큼 폐기량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백신은 부피를 줄이고 물류비를 절약하기 위해 한 병에 여러 명이 맞을 수 있는 용량을 담는다. 모더나 백신의 경우 한 박스에 100명분의 백신이 들어 있는데 이 100명분은 10병에 담겨 있다. 백신 1병으로 10명을 접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11명을 접종하면 2병(20명분)을 개봉해 사용하고 9명분이 남는다. 만일 접종센터에서 저녁 마감 후 9명분이 남았다면 이 분량은 다음 날 사용할 수 없으므로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백신을 접종하는 의료기관 1만 곳 가운데 1000곳에서 이런 상황을 맞는다면 매일 9000명분의 백신을 폐기하게 하는 셈이다. 화이자 백신 1병에도 5명 접종 분량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병에는 8~10명을 접종할 분량이 들어 있다. 신 의원은 "우리가 확보한 코로나19 백신은 한 번 개봉하면 실온에서 약 6시간 유지된다. 의료기관에서 접종을 마감하고 남은 백신은 다음 날 사용하지 못하고 폐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폐기물량을 줄이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접종 기관을 24시간 운영하거나 하루 접종 인원수를 제한하는 등 여러 방법이 있다"고 제안했다.
정부는 접종센터 250곳과 위탁 의료기관 1만 곳에서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할 계획이다. 이들 접종 기관에서 어떻게 적정 온도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점도 이번 백신 접종 시행계획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의 경우 백신 전용 냉장고, 보조 냉장고, 아이스박스 등 3중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만일 백신 전용 냉장고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전력이 끊기면 보조 냉장고를 사용하고, 보조 냉장고도 여의치 않게 될 경우를 대비해 아이스박스를 준비한 것이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보건소·의료기관 냉장고의 3분의 1만이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지난해 9월 질병관리청이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서울대 산학협력단(책임연구원 오명돈)은 보건소 38곳과 민간 의료기관 2200곳을 대상으로 수두 백신을 보관한 냉장고 상태를 조사했다. 2주 동안 86대의 백신 냉장고 온도를 측정했는데, 적정 온도인 2~8도를 유지한 냉장고는 26대(30.3%)에 불과했다. 특히 민간 의료기관의 경우 의료용이 아닌 가정용 냉장고를 쓰는 비율이 전체의 40.7%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가정용 냉장고로도 적정 온도인 2~8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문을 여닫는 과정에서 적정 온도를 벗어나는 경우를 감지할 장치가 없다.
냉장고 문제든, 전력 공급 문제든 적정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면 백신의 효과가 떨어지거나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신 의원은 "접종 현장에서 백신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면 효과가 없는, 시쳇말로 물백신을 맞을 수 있다. 따라서 24시간 자동으로 온도를 감지하고 적정 온도를 벗어나면 알람이 울리는 시스템을 갖췄거나 갖출 계획인 병원을 접종 기관으로 지정해야 한다. 수기로 백신을 보관한 냉장고의 온도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자동 온도 감지 시스템을 갖추는 일은 어렵지 않다. 지금이라도 백신 접종 시행계획에 이런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백신 폐기량을 줄이는 문제나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문제 등 세심한 부분의 대비가 소홀하면 백신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의료계는 백신 접종률을 높여 집단면역을 형성하는 것이 목표니만큼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 의료계는 고삐를 좀 늦추라는 경고 사인을 보내는 것이다. 이재갑 한림대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백신 접종을 너무 서두르는 모양새다. 백신 접종 초반에 콜드체인 문제 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천천히 안전하게 접종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도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기는 하지만 영국이나 유럽처럼 폭발적인 확산과 의료 시스템 붕괴 상황은 아닌데 너무 급하게 백신 접종을 진행하는 듯하다. 1만 곳의 의료기관에서 접종하는 인력을 짧은 시간에 교육하는 문제, 지난해 독감 백신처럼 유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 백신 접종 후 발생할 사망 사례 등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일본은 소규모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식으로 백신 임상시험을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선구매하던 지난해 9월부터 자체적으로 소규모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미국 모더나도 일본 다케다제약과 함께 임상시험을 시작했다. 다국적 제약사 화이자는 2020년 10월부터 성인 16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시험 결과와 4만 명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 임상시험 결과를 종합해 지난해 12월 일본 정부에 승인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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