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배 못 탔다지만 '여성 해적'은 많았다

김형민 2021. 2. 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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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소탕에 나선 민간 무장선에 기습을 당해 모두 끌려갔다. 총잡이 메리가 욕했다. "남자답게 싸웠으면 개처럼 목 매달릴 일도 없잖아." 앤과 메리는 사형을 면했다.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영국군 출신 메리 리드(위)와 명사수였던 아일랜드인 앤 보니(아래). 모두 남장 여자 해적이었다.

네 할아버지는 원양어업 회사에 오래 계셨다. 지상 근무를 하셨기에 망망대해를 누비는 마도로스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뱃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니 그쪽의 문화에 익숙하셨지. 어느 날 TV 드라마에서 출항 직전의 외항선에 여자가 올라타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치시더구나. “출항하는 외항선에 어떻게 여자가 올라가? 뱃사람들은 미신을 잘 믿는다. 휘파람을 불면 큰바람이 분다거나 (···) 그런 것처럼 배에 여자를 태우면 재수가 없다고 아주 싫어하지.”

이런 미신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뱃사람들 일반에 퍼져 있었어. 한국이건 중국이건, 프랑스건 영국이건 뱃사람들은 ‘여자를 태우면 좋지 않다’는 인식을 수백 년 동안 지녀왔다는 이야기지. 이런 속설이 생겨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거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일각일 수도 있겠고, “아름다운 여자는 바다로 하여금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라는 어설픈 동화 같은 믿음일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놀랍게도 수백 년 전, 승객이 아닌 선원으로 배에 올라탔던 여자 뱃사람들이 있었단다. 그 가운데 보통 어선이나 화물선, 또는 정규 군함의 선원이 아니라 자그마치 ‘해적’으로 유명한 사람 두 명에 대해 알아보자. 메리 리드와 앤 보니.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 국가들은 바다를 통해 어마어마한 부(富)를 본국으로 실어 날랐어. 그 와중에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대방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히려고 했지. 민간인들에게 ‘약탈 면허’를 주고 타국의 배를 공격하게 한 것도 그 작전 중 하나였다. 전쟁 후에도 약탈을 포기하지 않은 ‘민간인’들은 점차 해적으로 변신하게 돼. 해적들의 황금시대는 “길게 보아야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까지의 40여 년(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이었지만 이즈음 활동한 해적들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며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모델이 되었어. 메리 리드와 앤 보니가 해적의 일원으로 바다를 누빈 것도 바로 이때였지. 하지만 그들이 유일한 예는 아니었어.

“해적선은 갈 곳 없고 추방되고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장소였다. 이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특히 노동계급의 여자들이었다. (···) 남장은 노동계급 여성들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쓸 만한 방법이었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기록된 남장 여자 직원 사례만 100건이 넘을 정도다(샘 매그스, 〈걸 스쿼드:내 마음에 불을 지른 역대 최강 여성팀 20〉).”

메리 리드는 런던 외곽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메리의 어머니는 시댁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위해 메리를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속인다. 메리는 영국군에 입대할 만큼 거칠고 용맹하게 자랐지만 동료와 사랑에 빠져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나지. 메리는 다시 바지를 입고 바다로 향했어. 그리고 그가 탄 상선이 해적에 나포됐을 때 메리는 외친다. “나도 해적이 되겠다.”

그렇게 해적이 되어 바다를 누비던 어느 날, 메리는 잭 래컴이라는 해적 선장의 배에 합류하게 된다. 래컴의 배에는 또 한 명의 남장 여자가 타고 있었지. 이름은 앤 보니. 아버지는 하녀와 불륜을 저질러 앤을 낳았고 이혼당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앤 역시 강단 넘치는 여성으로 자라났어. 자신을 성폭행하려 덤비는 남자를 두들겨 패서 앓아눕게 만든 적도 있었지. 앤 역시 제임스 보니라는 선원과 결혼했지만 해적선 선장 잭 래컴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래컴의 해적선에 오른 것이었어. 앤은 우락부락하지 않고 잘생긴 남장 메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접근했는데 메리가 “나는 여자예요”라고 밝히자 실망(?)했다고 해. 해적 두목 래컴도 어지간히 눈치가 없었던 모양이야. 메리와 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에 질투를 느끼고 앤더러 “네 새 연인의 목을 베겠다”라고 펄펄 뛰었다고 하니까(〈걸 스쿼드〉 중). 메리가 정체를 밝혔을 때 래컴은 얼마나 머쓱했을까.

ⓒ위키백과

가슴 보여주면서 “넌 여자한테 죽는다”

앤과 메리는 그야말로 악명 높은 해적으로 이름을 떨쳤단다. 총칼을 휘두르는 전투에서도 뒤처지지 않았고 상대방의 목을 자르기 전에 먼저 가슴을 보여주면서 “넌 여자한테 죽는다”라고 알려줬다는 전설도 있어. 메리의 경우는 명사수여서 새롭게 사귄 자신의 해적 연인이 위협을 당하자 다른 해적을 결투 끝에 쏘아 죽이기도 했어.

하지만 해적으로서 그들의 운은 길지 않았다. 자메이카 근처 해안에 닻을 내리고 쉬고 있던 그들의 배를 해적 소탕에 나선 영국의 민간 무장선이 기습한 거지. 하필이면 동료들은 모두 술에 취해 있었고 필사적으로 저항한 건 앤과 메리 둘뿐이었어. 술 취한 해적들이 갑판 밑에 숨어들었을 때 총잡이 메리는 그들에게 총을 쏘아붙이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해. “이런 비겁한 놈들!”

머지않아 앤과 메리, 그리고 그들의 연인을 포함한 해적들은 굴비 엮이듯 끌려왔다. 그리고 앤과 메리를 제외한 전원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다. 선장 잭 래컴을 향해서 앤은 이렇게 일갈했다고 해. “남자답게 싸웠으면 개처럼 목 매달릴 일도 없잖아!” 앤과 메리는 사형을 면했는데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지.

해적들의 포로가 되었던 한 여성이 “남자 해적들이 나를 죽이려 하자 그들이 달려와 강하게 항의하며 보호해주었다(〈아틀라스 뉴스〉 2019년 6월11일)”라고 증언한 영향도 있었어. 메리는 아기를 낳은 뒤 열병으로 죽었지만 앤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출소 뒤 앤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이번에는 많은 자녀를 낳으며 여든 살까지 살다가 평온하게 죽었다고 해.

여성 해적들의 삶을 돌이키다 보니 문득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 3〉의 프롤로그가 떠오르는구나. 영국 해군에 잡혀 교수형을 당하는 남녀노소가 등장하지. 그 가운데 한 소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노래는 합창으로 변해. “요~호~ 모두들 깃발을 높이 올려라. 도둑과 거지들 (···) 우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 해적들은 ‘도둑과 거지’, 즉 당시 사회로부터 배척받고 탈락한 사람들이 택했던 절망적인, 하지만 유일한 출구였어.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악당들이었으되 그 내부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뽑고, 때로 그 자리를 박탈하기도 할 만큼 민주적(?)이었고 이익 분배도 상당히 공평하게 이뤄지는 ‘범죄 공동체’였다고나 할까(소설 〈보물섬〉에서 ‘검은 쪽지’를 전달해 자신들의 선장을 해고하는 장면을 기억해보렴).

“가난은 악의 근원”이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가난에 내몰린 거지들은 도둑이 되기 일쑤였고 그들은 해적을 자임하며 거친 바다에 나섰던 거란다. 앤과 메리가 남편을 잃지 않았거나 먹고살 길이 충분했더라면 그들이라 해도 서슴없이 해적선에 올랐을까? 그들을 미화하자는 게 아니다. 오늘날에도 해적들은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선 군함과 대포도 당연히 중요하겠으나, 해적질로 얻는 위험한 수익을 다른 방식으로도 벌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 필요하지 않겠니.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해적은 “영원히 죽지 않을” 직업으로 남을 테니까 말이다.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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