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악마를 물리친 후, 우리는 누구인가?
파키스탄이 국부로 추앙하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는 1876년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북서부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슬람 소수파인 시아파였고, 이혼으로 끝났으나 조로아스터교 신자와 결혼했다. 또 런던에서 유학하던 무렵에는 인도인으로는 최초로 영국 하원의원에 당선된 다다바이 나오로지(Dadabhai Naoroji)의 선거 운동을 도왔는데 다다바이 나오로지도 조로아스터교 신자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최종적으로 분리독립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으나 오랫동안 힌두교도와 협력하여 '하나의 인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진나가 꿈꾸고 계획한 '독립국가 파키스탄'은 종교와 문화에 대한 관용을 지닌 세속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으로 신생국가의 제도와 헌법을 마련하던 진나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독립국가 파키스탄'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배타적인 이슬람주의자가 대중을 선동하여 인기를 얻고 다른 쪽에서는 군대를 기반으로 장군들이 정치에 개입했다. 인도와 끊임없이 부딪혔을 뿐만 아니라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이 분리를 선언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그래서 1950년대와 1960년대 파키스탄의 역사는 엉망진창이다. 인도와 전쟁, 동파키스탄과 내전, 쿠데타가 번갈아 발생했다.
1971년 12월 20일,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가 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잡고서야 그런 혼란이 일단락했다.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로 선출한 정당성을 지닌 그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중심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를 도입했다. 1973년 내각책임제로 새롭게 출범한 정부에서도 총리로 권력을 장악한 후,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세제를 개혁했다. 그러나 선거로 선출한 정당성을 지닌 통치자였음에도 계엄령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억압했고 이슬람주의를 내세워 '세속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엘리트'를 핍박했다. 시간이 흐르자 정적을 납치하고 암살하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줄피카르 부토의 그런 통치는 반발에 부딪혔고 1977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나 부정선거라는 논란과 함께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미 민심을 상당히 잃은 터라 쿠데타는 성공했고 줄피카르 부토는 1979년 4월 4일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줄피카르 부토의 처형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었다. 선거로 선출한 정당성을 지닌 통치자였으나, 계엄령을 남발했고 정적 암살까지 자행했던 줄피카르 부토가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떠올랐다. 덕분에 아버지만큼이나 권력욕이 강한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그 유산을 이용하여 1988년 파키스탄 총리에 올랐다. 물론 베나지르 부토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선거 승리와 권력 획득, 쿠데타 발생과 권력 상실, 연금과 망명, 다시 선거 승리를 반복하다가 2007년 선거를 앞두고 폭탄테러로 삶을 마감했다.
재미있게도 베나지르 부토는 의도적으로 아버지 줄피카르 부토를 이상화했다. 계엄령, 반대파 탄압, 정적의 숙청과 암살 같은 '사악한 독재자의 얼굴'은 꽁꽁 감추고 '쿠데타에 맞서 싸우다 처형당한 순교자'란 모습만 부각했다. 따지고 보면 베나지르 부토 역시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줄피카르 부토의 후계자'가 되려고 형제를 살해했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그녀의 남편은 '뇌물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악명을 날렸다. 줄피카르 부토가 '민주주의의 순교자'라 불릴 만큼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실천했는지 의심스러운 것처럼 베나지르 부토도 정말 '이슬람 세계의 민주주의 사도'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며칠 전 주요 신문에서 미얀마의 쿠데타 소식을 알렸다. 군사정부의 오랜 독재를 끝내고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의회의 상당 의석을 군부에 할애하고 심지어 군부는 대통령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기괴한 형태였는데 그마저도 이제 무너진 셈이다. 군사정부 아래에서 오랫동안 가택연금을 경험한 아웅산 수치는 다시 구금되었다.
그런데 아웅산 수치는 과연 '민주주의의 사도'일까? 혹은 군사정부가 그녀를 살해하면 '민주주의의 순교자'가 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를 향한 오랜 투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니 '살아서는 민주주의의 사도이며 죽어서는 민주주의의 성인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단순히 군사정부에 반대했다고 혹은 독재자에 맞서 싸웠다고 '위대한 민주주의자'일까? 줄피카르 부토처럼 통치자로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군사정부가 처형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등극하는 사례도 있다. 베나지르 부토 역시 권력을 위해 형제를 살해했다는 의혹이 짙고 통치자로 엄청나게 부패했어도 폭탄테러로 삶을 끝낸 덕분에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기억한다.
아웅산 수치-공교롭게도 아웅산 수치 역시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이 미얀마의 국부로 추앙받는 영웅이다-도 어떤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의 사도'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다. 군사정부 아래에서 오랫동안 가택연금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투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선거의 승리와 협상을 통해 완전하지 않으나 어느 정도 통치권을 획득한 후, 그녀의 행동은 '민주주의의 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다양한 소수민족이 존재하고 또 불교도가 다수이나 상당수의 무슬림이 존재하는 미얀마에서 그녀는 통합과 관용을 이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지도자'가 아니라 분열과 차별을 선동하는 '국가주의의 지도자'처럼 행동했다. 무슬림인 로힝야족애 대한 탄압을 처음에는 묵인,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 관심이 덜한 다른 소수민족의 사례에도 비슷하게 대응했다. 또 가택연금 상태에서 야당을 이끌던 시절부터 아웅산 수치는 적어도 야당 내부에서는 '어떤 반론도 용납하지 않는 독재자'로 불렸다.
물론 100년 전 사망한 인물에 대한 평가조차 엇갈리는 만큼 아직 살아있는 인물인 아웅산 수치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독재자에 맞서 싸웠다', '독재자가 핍박했다', '독재자가 살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주주의의 사도', '민주주의의 성인', '민주주의의 순교자'라 부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단순히 늙은 악마와 싸웠다고 천사 혹은 영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늙은 악마를 물리친 후, 정의롭고 훌륭한 행동을 보여야 천사 혹은 영웅이다.
늙은 악마를 물리친 후, 새로운 '젊은 악마'로 본색을 드러내는 사례가 역사에는 자주 등장한다.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과연 지난날의 '늙은 악마'를 물리친 우리의 영웅을 여전히 영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에디터 코메디닷컴 (kormedimd@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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