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높이기보다 신선하게 설득하고 싶어요"
(9) 권정민
서울로 온 멧돼지 가족의 얘기
인간과 동식물 입장 바꾼 그림책
'자기계발서' '사전' 형식에
말 없는 존재들 시선·고통 담아
"인간은 저래도 되나" 의문 속
처지 바꿔 약한 존재 이해하기
자연스러움에 대한 낯선 시선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 계속"
“오늘 도심에 멧돼지가 출몰했습니다”로 시작하는 뉴스가 있다. 시시티브이(CCTV) 속 길 잃은 멧돼지의 움직임을 무심히 본다. 종종 사살, 포획 같은 단어가 들려온다. 1분 내외의 익숙한 리포트. 그나마 멧돼지가 삼겹살 식당으로 난입하거나 상가 유리창을 박살내는 ‘그림’이 있을 때만 전파를 탄다. 2019년 소방청 119생활안전대는 멧돼지 포획을 위해 6253회 출동했다.
권정민(42) 작가의 데뷔작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2016)를 처음 읽은 날, 서늘한 충격을 느꼈다. 포클레인에 떠밀려 서울로 온 멧돼지 가족의 탈주극이라는 소재는 새롭지 않았다. 사람 사회에 먼저 정착한 선배 멧돼지가 후배 멧돼지를 위해 쓴 자기계발서라는 형식이 빚어내는 낯섦이 있었다. 그림은 후미진 뒷골목에서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는 멧돼지를 보여주고, 글은 ‘먹을 수 있을 때 충분히 먹어 둘 것’이라 말한다. 광화문대로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르는 멧돼지 가족 옆으로 양돈장에서 사육한 돼지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간다. 이 장면 아래에는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닌 것에 감사할 것’이라고 씌어 있다. 글과 그림이 미묘한 각도로 비틀려 있고, 그 틈에서 익숙함과 한몸처럼 붙어 있던 부조리가 서서히 분리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자리에서 밀려난 생명의 살기 위한 분투에 ‘난동’, ‘점거’ 같은 단어를 붙이고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일을 과연 멧돼지를 향해서만 저지를까? 비극을 비극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무감하게 넘긴 적이 또 있진 않았나? 멧돼지에 대한 그림 16장과 문장 16줄을 읽었을 뿐인데 질문은 자꾸만 커져갔고, 그 끝은 나와 내가 속한 사회가 뭉개고 외면하는 지점을 정확히 향했다.
권정민 작가는 후속작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2019),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2020)에서도 인간과 동식물의 자리를 역전하며 질문한다. 뿌리와 이파리가 잘린 채 북반구로 팔려온 열대식물 입장에서, 수족관 돌고래 입장에서, 동물실험실 비커 속에서 고개를 들어 바라본 인간은, 나는, 아름다운가? 우리 쪽에도 일말의 좋음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은 올바르지만, 혈관 속 피가 데워지진 않는다. 익숙함에 스민 위태로움과 긴장을 가시화하는 작가 권정민은 맥이 멈춘 낡은 격언에 신선한 숨을 불어넣고, 굳은 생각 회로를 주물러 새로운 통로를 연다. 지난 1월8일,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작가를 만났다.
“보이지 않는 뒤편 건드리고 싶어요”
―방송작가로 오래 일하다 2013년 보림그림책 창작스튜디오를 통해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왜 갑자기 그림책이었나요?
“<교육방송>(EBS) 방송작가로 10년간 일하며 <시네마천국>, <다큐 프라임―이야기의 힘>, <지식채널 e>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오롯이 나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미디액트 단편영화 워크숍, 한겨레 그림책학교 등 다양한 문화기관의 수업을 들으면서 그림책에 점점 매료되었어요. 종이와 나 단둘이 씨름하는 매체라는 점, 제한된 지면에서 전후 맥락을 고려해 정확한 장면을 배치해야 한다는 점, 추상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는 점, 작업 과정이 무척 어렵지만 책상에 앉아 시간을 들이고 재치를 끌어모으면 한 권을 만들 수 있다는 점, 짧은 책 한 권이 완벽하게 완결된 고유한 세계라는 점이 좋았어요.”
―방송작가로서 가졌던 습관 중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나요?
“자료 조사를 철저하게 합니다. 너무 많이 해서 길을 잃을 정도이지요.(웃음)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을 꽤 다녔지만, 그림을 전공으로 배우지는 않았어요. 그림에 대한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어서 자료에 매달리는 게 아닐까 해요. 캐릭터 하나가 극을 끌고 가는 기승전결 구조를 채택하지 않고, 자기계발서나 사전 형식 등 책의 형식 자체를 독특하게 설정하는 것도 이야기 짓기를 어려워하는 저의 부족함을 채우는 나름의 방편 같고요.”
―작가님이 선호하는 그림책은 어떤 특징을 가졌나요?
“글은 이렇게 말하고 그림은 저것을 보여주지만, 독자인 나 스스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는 책. 보이지 않는 뒤편을 건드리는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지혜로운 멧돼지…>는 면지부터 강렬해요. 포클레인에 밀려 벼랑 끝까지 몰린 어미 멧돼지와 새끼 3마리가 보입니다. 강제 철거로 집을 잃은 도시 난민 이미지가 자연스레 중첩돼요. <우리는 당신에 대해…>는 뿌리가 뽑힌 채 팔려나가는 열대식물 알로카시아에서 영감을 얻으셨다고요.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밀려난 존재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생겨났나요?
“<지혜로운 멧돼지…>는 보도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 책이에요. 중학교에 멧돼지가 출몰해 사살된 후 찍힌 사진이었는데, 쇼핑 카트에 멧돼지 사체가 담겨 있고, 전교생이 빙 둘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어요. 포획한 어른들이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죽음 옆에서 저렇게 웃어도 되나? 웃음이 당연한 상황은 아닐 텐데?’라는 질문이 저를 사로잡았어요. 책을 완성하기까지 4년이 걸릴 정도로 고된 과정이었는데, 포기하지 않은 건 첫 질문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에요. 도로에서 뿌리 뽑힌 나무를 잔뜩 싣고 가는 트럭을 보면 ‘저 나무는 누구 소유길래 저렇게 마음대로 쓰나?’ 싶습니다. 일상에서 사람에 의해 마구 다루어지는 대상을 보면 ‘저래도 되나? 인간은 어디까지 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들어요. 직접 가서 따지지는 못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 그냥 넘어갈 수 없는지 이유를 머릿속으로 셈하다 보면 현상을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때가 있어요. 그런 마음을 모아서 책을 만들어요.”
“말 못하는 존재의 목소리도…”
―최근작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도 글과 그림의 부조화로 생각이 멀리까지 나아갑니다. 그림은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여러 행위(목줄 걸어 산책 시키기, 생체실험, 사냥, 유기하기 등)를 보여주는데, 동물과 인간의 자리가 뒤바뀌어 있어요. 글은 사전 풀이처럼 ‘산책, 생물학, 여가, 이별’ 등 낱말의 의미를 알려주고요. 인간-동식물의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서로를 동일시하는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강자에게는 자연스러운 상황이 약자에게는 폭력일 때가 있잖아요. 말 못하는 존재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조금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식물을 향한 애정보다는 삶 전반에서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관계나 현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큽니다.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도 처음엔 인간-동물뿐 아니라 남성-여성, 부모-자녀, 고용주-피고용인, 산부인과 의사-산모 등 위계 있는 구도를 뒤집어보는 상상에서 출발했어요. 흔히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연습하지 않으면 관성대로 현상을 바라보게 돼요. 우리 뇌는 익숙한 패턴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반대되는 정보가 들어오면 불편함을 느껴요. 입장 바꾸기는 뇌의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고, 부단한 연습이 필요해요. 다행히 저에게는 흥미로운 작업입니다. 자리를 바꾸면 새로운 시선이 열리거든요.”
―작가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외양은 그리 호감형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특권을 누리는 인간을 굳이 더 이쁨 받도록 그리지 않은 걸까요?
“제 책은 동식물을 다루고는 있지만, 결국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혐오스러운 면을 보여주지만, 인간을 결코 혐오할 수는 없는 화법을 좋아해요. 인간을 비아냥대는 것조차도 시간을 많이 들여 관찰하고 사고해야 가능해요. 그런 화법을 배우기 위해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빌 브라이슨의 수필을 자주 펼쳐 봅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의 식물 화자 목소리를 정할 때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참고했어요. 인간을 놀려대는데도 어쩐지 사랑스럽고 믿음이 가는 화자인데요. 제 책에서도 인간을 향한 시니컬한 시선과 포용하는 시선이 함께 느껴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주제 자체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의미를 많이 두는 편이에요. 같은 메시지도 전달 방식에 따라 수용자의 태도가 달라지거든요. 목소리 높여 외치기보다는 신선하게 설득하고 싶어요.”
―작가님 책에선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고통 없는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읽혀요. 하지만 현실엔 폭력과 고통이 만연하잖아요. 이 괴리를 어떻게 견디시나요?
“‘인간은 잔혹합니다, 답이 없어요’라고 말하면 간단하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점점 단순하고 간단한 답을 원하는 것 같아요. 3분짜리 영상을 클릭하듯 말이에요. 하지만 3분 안에 양자역학을 이해할 순 없지요. 인간은 복잡한 다면체예요. 인류를 사랑해야지 다짐하면서 동시에 지하철 옆자리 사람을 미워해요. 저 역시 그래요. 이런 책을 만들지만, 제 안에도 모순이 많아요. 친환경 세제를 샀다가도 거품이 제대로 나지 않으면 일반 세제로 바꾸고, 아이 반찬 준비가 힘들 때는 돈가스를 사주죠. 의식하지 않으면 쉽게 무관심해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먼저 제 안의 괴리를 줄이려고 해요. ‘혹시 내가 함부로 힘을 사용하진 않았나?’ 자주 자문해요. 도덕과 윤리는 왜 우리에게 때리지 말고 훔치지 말라고 반복해 가르칠까요? 내키는 대로 살면 누구든 불의한 짓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자기 성찰은 자동으로 되지 않아요. 불편하고 어려워요. 그럼에도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인간다움 같아요. 타락한 세상인 것도 맞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함을 지켜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요. 그들처럼 살고 있진 못하지만,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머릿속은 흙이 와글와글 달라붙은 양파 뿌리처럼 답하기 어려운 온갖 질문으로 뒤엉켰다. 나는 공장식 축산에 슬픔과 공포를 느끼고 탈육식했지만, 우리집 다용도실에는 배달 음식을 먹고 나온 일회용 쓰레기가 한 무더기다. 외모나 학벌이 자원이 되는 현실에 분개하면서 대외적으로 나가는 프로필에는 그럴싸한 사진과 경력을 넣고 싶다. 평화, 연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중요하다고 믿지만, 그런 거창한 단어를 입에 올리기에 내 일상은 모순으로 울퉁불퉁하다. 분노-부끄러움-무력감의 사이클을 뱅뱅 돌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책으로 도망갔다.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에 나오는 문장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에 위안을 얻고,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에서 ‘평화는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과 모순을 정리하지 않고 견디는 힘’이란 문장을 발견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권정민 작가의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성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 이번 인터뷰의 의미가 거기 적혀 있었다.
■ 권정민 작품 목록
2016년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보림
2019년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문학동네
2020년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 문학과지성사
■ 대표작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 작가 소개
대학은 응용동물과학과로 진학했지만, 전공과는 담을 쌓았다. 대신 미술 동아리방에서 렘브란트, 뭉크 등의 명화를 따라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방송국 교양 피디를 꿈꾸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했다.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키우다 34살에 그림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페이지 구성, 그림체, 원고 톤 모두 수십 번 고치며 길을 찾는 엄청난 노력파.
▶ 최혜진. 사람을 인터뷰하는 에디터이자 미술과 문답한 과정을 글로 쓰는 작가.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등을 썼다. 삶에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늘 그림책이 곁에 있던 것을 생각하며,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과 ‘세상을 돌파하는 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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