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은 거리에, 노동존중은 어디에
[경향신문]
“건강 얘기는 하지 맙시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암 선고를 받은 몸으로 어떻게 걷느냐는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이날 김진숙 지도위원은 경기도 평택역에서 진위역까지 15㎞를 걸었다. 영하 5도를 밑도는 날씨였다. 그는 겨우내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걸었다. 왜 청와대를 가는가. 김 지도위원은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알리고 자신의 복직을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 1986년 7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된 그는 36년째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는 편지에 “86년 최루탄이 소낙비처럼 퍼붓던 거리 때도 함께 있었던 우리는 어디서부터 갈라져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 걸까요. 그 옛날 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던 문재인 대통령님. 저의 해고는 여전히 부당합니다, 옛 동지가 간절하게 묻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되묻고 싶다고 했다. “36년을 해고 노동자로 살고 있습니다. 제 복직 얘기가 아니에요. 변하지 않는 노동 현실에 대해 저는 좀 묻고 싶어요.”
■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
2월 2일 오전 11시. 평택역에서 김 위원을 따라나섰다. 선두에 선 김 위원의 발걸음은 빨랐다. 금세 땀이 났다. 칼바람이 무뎌져 걸을 만했다. 김 위원에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는지 물었다. 그는 ‘걷다 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다만 옛 기억이 가끔 떠오른다고 했다. 해고당할 무렵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온 기억, 감금됐던 시간. 해고를 당한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2011년 희망버스도 생각나요. 그때도 희망버스 힘으로 크레인에 내려왔는데 이번에도 많은 분이 연대하고 있어요. 부산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이렇게 많은 분이 함께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김 위원은 자신의 도보행진을 ‘희망뚜벅이’라고 부른다. 희망뚜벅이 행렬은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길어진다. 이제는 평일에도 200명 넘는 이들이 김 위원과 함께 걷는다. 여기에는 해고 노동자와 민주노총 조합원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있다.
지난해 7월 정부 출연기관에서 정년을 마친 박지호씨(60·경남 거창)는 평택에서 희망뚜벅이에 합류했다. 평택을 시작으로 2월 7일 청와대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걷는다. 정년 퇴직자 박씨는 왜 희망뚜벅이에 동참할까. “김진숙씨가 왜 돌아가려고 할까 생각해봤어요. 좋은 일자리도 아니고. 이미 정년이 지났잖아요. 김진숙씨는 정당한 노조활동을 하다가 추방당했어요. 부당 해고니까 인정할 수 없죠. 그러니까 반드시 자신이 선택한 일터로 돌아가 인생을 꾸려보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꿈꾸던 삶을 의지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어요. 그걸 침해당했을 때는 투쟁할 권리도 있습니다. 저는 그 권리를 응원합니다.”
오후 1시쯤 평택시청 송탄출장소에 도착했다. 계단에 앉아 김밥과 떡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내 걸음을 옮기려던 희망뚜벅이 일행 앞을 경찰이 막아섰다. 경찰 측은 “집시법 위반에 해당한다”며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대치 상황에서 일행 중 누군가 “당신들이 해고를 아느냐”고 물었다. 경찰은 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경찰벽을 피해 거리로 빠져나갔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박민수씨(가명)는 해고를 잘 알고 있다. 1989년 입사한 박씨는 2009년 6월 정리해고된 뒤 2017년 4월 노사 합의에 따라 복직했다. 내년에 정년을 맞는다. 지난 1월 31일 천안 성환 일정부터 희망뚜벅이에 합류했다. 박씨는 “일하는 사람에게 해고가 어떤 의미인지. 부당 해고가 삶을 어떻게 흔들어 놓는지 저는 잘 알아요.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김진숙씨 복직 투쟁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싸움이에요”라고 말했다.
김 위원의 해고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벌인 노동탄압의 결과다. 2009년 11월 2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김 위원의 해고 조치가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회사에 복직을 권고했다. 지난해 9월에도 복직을 재권고했다. 부산시의회는 김진숙 복직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도 여야 합의로 복직 권고 특별결의안을 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이를 거부했다. 복직할 경우 해고 기간 동안 급여와 퇴직금 지급으로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다. 한진중공업 최대 주주인 산업은행 역시 “산은이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복직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싸움”
조영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부회장은 경향신문 기고를 통해 “김진숙을 금전보상을 하며 상징적으로 복직시키더라도, 민주화운동법 등의 취지에 따라 사용자의 의무이행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므로 현재 은행관리사인 산업은행과 한진중공업 사측의 주장인 업무상 배임 행위는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의 공약을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희망뚜벅이에 동참한 대학생 김건수씨(25)도 더 늦기 전에 정부가 노동존중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노동존중 사회는 오지 않았고 또 요원하다. “노동존중을 내건 후보자에게 희망을 걸고 선택한 거잖아요. 그 희망이 발현되지 않았을 때 우리 사회는 얼마나 실망하게 될까요. 저는 두렵습니다. 노동개혁에 실패하면 걸어온 만큼 후퇴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정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노동존중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노동 3법 등 오랜 숙제였던 법제도적 개혁을 마침내 해냈다”며 성과를 강조했다. 하지만 법과 제도는 미완에 그쳤고 핵심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집권 이후 지금까지 한 건의 국제노동기구(ILO) 협약도 비준하지 못했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이 144개국 노동권 현황을 조사해 발표한 ‘2020년 글로벌 노동권 지수’에서 한국은 5등급을 받았다. 중국,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브라질이 5등급에 속한다.
조돈문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노동존중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지표는 모두 하락했는데 정부만 스스로 나아졌다고 평가한다”며 “약속한 핵심 공약은 이행되지 않았고, 일부 시행한 것들도 다 철회하거나 유턴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적어도 노동존중을 추구하는 사회라면 김진숙 위원의 부당 해고처럼 청산하지 못한 과거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빼앗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노동존중 정부가 이행해야 할 책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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