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숙이 복직이 내 아들의 복직이야"
[경향신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늘 언급하는 이름이 넷 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박창수 위원장은 안양구치소에서 아직도 풀려나지 못했고, 김주익 지회장도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재규형은 4도크에서 올라오지 못했고, 정리해고 투쟁을 가장 열심히 했던 강서도 복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습니다.” 한진중공업에서 의문사로, 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들이다.
고 박창수와 김진숙은 입사 동기다. 김진숙은 용접공으로, 박창수는 배관공으로 1981년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주식회사)에 입사했다. 한 사람은 30년 전에 의문사로 사망했고, 한 사람은 36년째 복직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어도…”
“진숙이가 벌써 환갑이 지났다고? 아이고 진숙이가 참말로 고생만 하고 회사에서 인간 대접도 못 받고 나이가 육십이 돼버렸구나. 이거를 어쩌겠노. 지금이라도 진숙이 명예회복을 시켜야 돼.”
박창수 어머니 김정자씨(85)가 김진숙 복직 투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김진숙이 암 투병 중에도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걷고 있다는 말에 계속 눈물을 훔쳤다. 김씨는 심장 수술, 고관절 수술 등으로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다.
아버지 황지익씨(85)는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진숙이 복직시키라고 서울에서 농성을 한다고 해. 나도 서울로 달려가 피켓을 들고 싶은 마음이었어요”라며 “아무리 정권이 바뀌어도 제일 억울하게 당하는 건 노동자야”라고 언성을 높였다. 박창수를 네 살 때부터 키운 황씨는 30년 동안 진상규명에 앞장섰다.
1986년, 김진숙이 해고되자 사람들은 ‘빨갱이’라며 그를 피했다. 그때 박창수는 거리낌없이 김진숙에게 다가가 “고생한다”며 박카스를 건넸다. 사람들은 박창수를 ‘차분하고 순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1990년 첫 민주노조 위원장으로 당선된다. 조합원 93%의 압도적인 지지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 변호사)과 노동자들이 노동법을 공부하는 모임을 할 때였다. 노무현이 박창수를 보고는 김진숙에게 말했다. “저 사람, 사람이 됐다. 다음에 위원장 시키라.” 김진숙은 부산 문현동 꼭대기에 있는 박창수 집을 찾아 위원장 출마를 권유했다. 김진숙은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지금도 그게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걱정이 앞섰다. “야 그거 뭐 하러 하냐. 요새 어디 잡혀갔다 하면 노조위원장인데 왜 그걸 맡았나? 그러니까 조합원들이 90% 넘게 지지를 한다고 뿌리칠 수가 없다고 해요. 동생들한테는 ‘야, 형이 이렇게 인기가 많다’고 농담으로 해.”(황지익)
몇달 되지 않아 박창수는 구속됐고 수감 중 사망했다. 경찰은 박창수가 병원 5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했지만 떨어진 사람의 시신이 아니었다. 손목과 목 뒷부분에 상처가 있었을 뿐, 시신은 깨끗했다. 심지어 팔에 링거가 꽂혀 있었고, 링거 파편은 시신 주변 1.5m 반경으로만 퍼져 있었다. 마치 누가 흩어놓은 듯 보였다.
아버지 황씨와 김형태 변호사, 노무현 변호사, 박종환 검사, 병원장 등이 만나 양측 동의하에 부검을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경찰 1000여명이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며 영안실로 들어왔다. 백골단은 영안실 벽을 망치로 깨부수고 들어와 시신을 가져갔다. 25㎝나 되는 벽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익히 알려진 ‘시신 탈취’ 사건이다. 얼마 뒤 경찰은 투신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김진숙을 비롯한 조합원들은 서울을 찾아 “서울시민 여러분! 우리 위원장님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싸울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라고 외치고, 전경에게 달려들어 “제발 우리를 구속해라. 그래야 신문에 날 것 아니냐” 하며 애원했다.
“창수도, 주익이도 같이 복직되는 거야”
두달 만에 장례를 치렀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후회부터 앞선다. 먼저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박창수가 사망한 당일 새벽 3~4시께 20~30대로 보이는 남성이 박창수를 부축해 병원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고, 10분 후 ‘쿵’ 소리가 났다는 증언이 나왔다고 발표했다. 자살이 의문사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 남성이 누구인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 이른바 한진중공업을 ‘관리’하던 홍모 당시 안기부 직원의 알리바이는 믿을 만한지, 쿵 소리는 무엇이었는지, 박창수 목 뒷부분 손상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여전히 남은 과제다.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의 죽음도 박창수 가족에게는 아픔으로 남았다. “우리가 조금만 더 했으면 진숙 언니가 복직했을 것 같고 주익이 아저씨나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오빠는 갔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아프진 않았겠죠.”(막냇동생 황인선)
아버지는 김진숙 복직을 ‘아들이 못다 한 일’이라고 표현한다.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올랐을 때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희망버스에 탄 이유다.
“나하고 박종철이 아버지하고 칠십 넘은 노인 둘이서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담을 넘어서 한진에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참 새삼스럽게 우리 창수도 생각이 나고, 주익이도 생각이 나고… 창수가 죽은 지 20년이 됐는데도 왜 변한 게 없나. 내가 그때 조합원들 붙잡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가족들의 올해 바람은 김진숙 복직과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차원에서 박창수 30주기 추모제에 참가하는 것이다. 어머니 김씨는 30년 동안 한 번도 아들 추모제에 가지 않았다. 도저히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는데 그래도 자신이 더 나이 들기 전에 다 같이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진숙이가 해고된 지가 36년이 됐어요. 다른 사람은 다 복직이 됐는데 진숙이 하나만 복직이 안 되네. 진숙이가 바른 소리를 따따따 하니까, 타협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도 한진이 진숙이 복직은 해줘야 돼. 그게 우리 창수 염원이고 창수도, 주익이도 다 같이 복직되는 거야.”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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