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이야기]샤넬, 바느질하며 꿈꿨던 가수의 길 접고 패션의 길 열다

2021. 2. 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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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 만나면서 인생의 방향 달라져..모자점을 시작으로 파리 캉봉가에 '샤넬 모드' 열어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샤넬②

1913년 프랑스 도빌의 샤넬 매장 앞에 선 코코 샤넬.




코코 샤넬은 1905년 스물두 살 때 좀 더 큰 도시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물랭을 떠나 약 50km 떨어진 비시로 갔다. 물랭은 군사 도시였고 비시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휴양 도시였다. 예술가들의 도시이자 휴양 도시에서 샤넬은 외국어를 들을 수 있어 기뻤다. 작은 방을 얻어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교습비를 내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바느질을 했다.

잠을 아끼고 이를 악물고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하지만 4개월 뒤 선생님에게서 받은 평가는 절망적이었다. 선생님은 “새처럼 목소리가 가는 데다 표정이란 게 전혀 없다”며 “게다가 너무 말라 뼈밖에 보이지 않아 차라리 바느질이나 하는 편이 낫겠다”고 혹평했다. 샤넬에게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가수의 꿈을 접었다.

샤넬은 비시의 온천 휴양지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하얀 복장을 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온천에서 나는 약수를 길어 유리잔에 부은 뒤 휴양객들에게 건네는 일을 했다.

그는 그 무렵 그의 인생에서 첫 연인 에티엔 발장과 사귀고 있었다. 샤넬은 발장과 경마장에 자주 들렀고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 있다니…”라며 감탄했다. 발장은 그런 샤넬의 요구를 채워 줄 재력이 됐다. 그는 샤넬에게 콩피에뉴에 말 사육장을 갖고 있다며 원한다면 그곳에 함께 가자고 샤넬에게 제안했다. 샤넬은 발장을 따라 프랑스 북부 도시 콩피에뉴로 갔다.


도빌 샤넬 매장 앞에서 샤넬(가운데 서 있는 여성)과 연인 아서 카펠(샤넬 왼쪽).

첫 연인 갑부 발장 따라 경마장 딸린 성으로

발장의 부모는 직조 산업으로 유명한 생에티엔 출신으로, 대대로 운영해 온 섬유 공장을 물려받아 프랑스 최대의 기업으로 키웠다. 하지만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발장을 비롯한 세 아들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발장은 ‘루아얄리외’라는 말 사육장이 딸린 성을 샀다. 그는 샤넬과 함께 루아얄리외 성에 갔다. 샤넬은 성에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샤넬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는 이를 악물로 승마 연습에 매진했다. 발장의 정부(情婦)라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 훌륭한 기수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루아얄리외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른 숙녀 기수들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품을 주렁주렁 단 복장을 하고 산더미처럼 장식물들을 단 모자를 쓰고 나왔다. 반면 샤넬은 수수하고 단순한 밀짚모자를 쓰고 경마장에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숙녀 기수들은 샤넬이 쓴 모자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샤넬은 그의 인생 처음으로 자그마하지만 유행을 선도하는 성취를 이룬 것이다.

샤넬 패션의 시작은 루아얄리외성 경마장에서 시작됐다. 프랑스에서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17세기 태양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 때 궁전에서 입던 옷과 스타일에서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숙녀들은 하루 다섯 번씩 옷을 갈아입어야 했는데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드레스를 시녀들의 도움으로 겹겹이 입어야 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남성들에게 보여주기 식 패션 스타일이었다.

샤넬은 사람들이 놀랄 일을 저질렀다. 당시 다른 여성들은 감히 도전할 엄두를 내지 않았던 승마 바지를 입은 것이다. 샤넬이 대장장이 집에서 빌린 승마 바지를 맡기면서 “내 몸 사이즈에 맞는 이런 모양의 바지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재단사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귀족 집안 하인들의 옷을 만드는 것인데 당시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은 엉덩이를 충분히 가릴 수 있을 정도로 품이 넉넉한 치마를 입었다. 길이는 바닥까지 끌릴 정도로 길었고 묵직해야 했다. 실용적인 측면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여성은 정숙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맞춘 것일 뿐이었다. 그게 사회적 이상이라고 여겨지는 시대였다.

샤넬이 승마 바지를 입은 것은 1907년이었다. 당시 바지 소재와 관련해 신문 머리기사에 실린 두 가지 소식을 보면 샤넬의 승마 바지 착용이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첫째 기사는 프랑스 내무부가 남자들이 자전거를 탈 때 통 좁은 반바지를 입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통 넓은 나팔바지를 입으면 자전거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얼마 뒤 두 여성이 바지를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볼로뉴 숲을 달리다가 경찰에게 붙잡힌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 당시 사회 분위기는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은 볼썽사납게 받아들였고 금기 사항이었다. 다리 사이를 연상하게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바지를 입지 못하게 했다.

모델 마리 엘렌 아르노가 입은 샤넬 슈트.



둘째 연인 영국인 사업가 카펠 도움 받아 개업

샤넬은 모자를 만드는 데도 온 힘을 다했다. 처음에는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지인과 친구들에게 취미로 만들어 주다가 주문이 몰려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파리로 가 백화점에서 모자들을 구입해 루아얄리외로 가져와 샤넬만의 스타일로 고쳐 팔았고 인기가 있었다.

샤넬과 발장은 1908년 사냥을 하러 프랑스 피레네 지방의 포라는 곳에 갔다. 그곳에서는 샤넬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샤넬 인생의 둘째 연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영국인 아서 카펠이다. 보이라는 애칭을 가진 그는 미남에 영국 뉴캐슬에서 석탄 소송 화물업을 하는 재력 있는 사업가였다. 그는 영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발장과 달리 휴머니스트적인 면모가 있었다.

샤넬은 발장에게 파리에 모자점을 낼 수 있도록 발장 소유의 집을 빌려달라고 제의했고 카펠도 샤넬 편을 들었다. 발장은 샤넬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리 말셰르가에 있는 집을 내줬다. 당시 유럽에서 모자는 여성들에게 생활필수품이었다. 외출할 때 모자를 쓰는 것은 일상화되다시피 했다.

샤넬은 파리에 모자점을 내고 예술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세련된 감각을 가진 카펠은 런던과 파리를 수시로 오갔다. 샤넬은 카펠의 도움을 받아 파리 캉봉가 21번지에 ‘샤넬 모드’를 개업했다. 샤넬은 패션 성공의 길로 본격 내닫기 시작했다.

※‘코코샤넬(카타리나 칠코프스키 저, 솔 출판사)’ 등 참조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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