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의 역습이냐, 트럼피즘 귀환이냐..'게임스톱' 전쟁 전말
지난달 28일 오전 10시(현지시각)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 주식시장이 문을 연 지 겨우 30분 지난 시각이었지만 심상치 않은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미국 게임 전문 소매업체 ‘게임스톱’ 때문이다. 이 회사 주식은 지난 1월 내내 속칭 ‘개미’라는 개인 투자자와 헤지펀드를 중심으로 한 일부 기관투자자 간 힘겨루기 판이 돼버렸다. 기관투자자들을 꺾어버리겠다는 개미 군단의 공격적 투자 덕분에 20달러 수준이던 게임스톱 주가는 한 달 만에 347달러까지 수직 상승했다. 이날도 증시가 열리자마자 주가가 치솟아 순식간에 483달러까지 올랐다.
정각 10시, 반격이 시작됐다. 기관투자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게임스톱 주식을 엄청나게 많이 팔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 게임스톱 주식을 공(空)매도한 헤지펀드였다. 공매도는 투자 기법의 일종으로, 주가가 하락해야 돈을 번다. 기관들의 매도 물량이 쏟아지면서 게임스톱 주가는 그야말로 ‘번지점프’를 했다. 9시 59분 483달러이던 주가는 11시가 되자 113달러까지 떨어졌다. 주가의 4분의 3이 빠진 것이다. 1시간 동안 서킷 브레이커(주가가 급하게 오르거나 떨어질 때 투자자들을 진정하고자 일시적으로 거래를 막는 조처)를 7번이나 발동할 정도로 기록적인 폭락이었다. 하지만 게임스톱에 투자한 개미 투자자는 속수무책이었다. 로빈후드 등 개미 투자자가 많이 쓰는 주식 거래 애플리케이션(앱)들이 이날 오전 갑자기 게임스톱 주식을 살 수 없도록 막아버렸기 때문. 게임스톱 주식에 투자해 이날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던 유모씨는 “온 몸이 밧줄로 묶인 채 덩치 큰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며 “시장경제에 군림하는 거대한 금융 권력의 존재를 절감했다”고 말했다.
개인의 주식 거래를 막은 초유의 사태에 주가 폭락까지 겹치자 일이 커졌다. 정치권도 참전했다. 이날 뉴욕 증시가 폐장한 후 미국 내 좌파 포퓰리즘 선봉장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연방 하원 의원(민주당)과 우파 포퓰리즘의 기수 테드 크루즈 연방 상원 의원(공화당)이 “거래를 막은 금융회사들을 조사해야 한다”며 개미들을 편들고 나섰다. 개미 투자자와 좌우를 넘은 포퓰리즘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1라운드: 과열
미국 개미 투자자와 정치인들의 공적은 헤지펀드를 비롯한 대형 금융회사들이다. 이전부터 미국 증시에선 자본력을 앞세운 헤지펀드들이 공매도를 통해 개미들을 희생시키고 큰돈을 번다는 반감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공매도는 통상적 주식 투자와 반대다. 공매도를 하면 주가가 폭락할수록 큰돈을 벌지만, 주가가 오르면 그만큼 돈을 잃는다. 공매도를 한 헤지펀드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주가를 떨어뜨리려고 한다. 공매도한 회사의 재무 상태를 뒷조사해 약점을 폭로하고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식이다. 아예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등 불법을 저지르는 일도 종종 있다.
이번에 개미 투자자의 분노에 불을 붙인 건 지난달 21일 게임스톱 주식을 공매도한 헤지펀드 ‘시트론리서치’의 앤드루 레프트 대표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게임스톱에 투자하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도발하는 영상을 올린 사건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게임스톱 주가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21일 43달러 하던 주가가 4일 만에 두 배로 뛰었다. 개미 투자자들이 “레프트 같은 공매도꾼을 혼내주자”며 똘똘 뭉쳐 게임스톱 주식을 집중 매입한 덕분이다. 게다가 일부 투자자들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콜옵션 같은 파생 금융 상품을 활용해 더 효과적으로 헤지펀드의 공매도를 분쇄할 방법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개미들의 반격 때문에 일부 헤지펀드는 수천억원 손실을 보고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레프트 대표 역시 27일 “다시는 공매도를 하지 않겠다”며 항복 선언을 했다. 미국 여론은 “똑똑한 개미들이 거대 헤지펀드를 이겼다”며 들끓었다.
승기를 잡은 개미들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공매도를 완전히 끝장내자”며 게임스톱 주식을 계속 사들였다. 주가가 300달러를 돌파하자 우려가 터져 나왔다. 문제는 게임스톱이 내리막길을 걷던 기업이란 점이었다. 이 회사의 주업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게임과 게임기를 파는 것이었지만, 코로나 사태 여파로 게임 역시 온라인 구매 비율이 높아지면서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기업 가치 평가의 대가인 뉴욕대 어스워스 다모다란 교수는 “게임스톱의 적정 주가는 아주 좋게 봐주면 40~50달러 정도”라며 “투자가 과열되면 고점에서 투자한 개미들은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 공개 경고하기도 했다. 그 경고는 28일 현실이 됐다.
2라운드: 음모론
28일 게임스톱 주가 폭락 사태 이후 곧바로 음모론이 등장했다. 공매도한 헤지펀드와 증권사가 로빈후드 경영진을 압박해 개미들의 거래를 막아버리고 주가를 폭락시켜 큰돈을 벌었다는 주장이었다. 개미 투자자가 많이 모인 미국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엔 “로빈후드의 최대 고객이 시타델 증권인데, 이 시타델 증권이 공매도 세력의 핵심”이란 글이 수십 건 올라왔다. 실제로 시타델 증권은 게임스톱 주식을 공매도한 헤지펀드에 거액을 투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개미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테드 크루즈 의원 등 포퓰리스트뿐 아니라 ‘월스트리트 저승사자’라는 거물 정치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민주당)도 음모론에 호응했다. 워런 의원은 지난 2일 로빈후드에 공개 서한을 보내 “게임스톱 주식 거래를 막은 이유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로빈후드 경영진은 “투자가 과열되면서 개인 투자자뿐 아니라 회사로서도 위험이 커졌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거래를 막은 것”이라라고 해명했지만,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과격 행동을 하는 개미들도 나타났다. 몇몇 개미가 공매도를 한 헤지펀드 직원들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해킹해 개인 정보를 인터넷에 올리거나, 한밤중에 집으로 피자를 배달시키는 등 테러를 저질렀다. 심지어 헤지펀드 대표의 자녀 전화번호를 알아내 “너의 아버지가 비열한 공매도꾼인 거 아냐”는 등 위협 문자를 보낸 사건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개미들을 영웅시하던 여론도 바뀌고 있다. 게임스톱 뿐 아니라 AMC 같은 다른 주식이나 은(銀) 같은 원자재까지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공매도 투자 기관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모습이 포퓰리즘과 다름없다는 비판이 거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CNN은 지난달 28일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지지자들에게 거대 금융 권력에 맞서라는 메시지를 종종 보냈다”며 “게임스톱 개미 투자자들이 활동하는 레딧은 극렬 트럼프 지지자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이었다”고 지적했다. 사태 초기 비난 일색이던 공매도에 대해서도 “순기능도 많다”며 옹호하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 31일 워싱턴포스트는 “공매도 투자자들은 실적을 부풀리고 사기를 치는 기업들을 찾아내는 전문가들”이라며 “이번 사태에서 (게임스톱 주가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린 쪽은 공매도를 한 헤지펀드”라고 옹호 칼럼을 내보냈다.
한국도 개미 포퓰리즘 상륙
게임스톱 사태가 바다 건너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도 게임스톱 주식에 투자한 금액이 1조원을 넘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 1월 한국 투자자들이 거래한 게임스톱 주식이 3500억원어치에 달했다. 28일 이후 게임스톱 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큰 피해를 보는 개미 투자자도 늘고 있다. 주가가 90달러까지 떨어진 지난 3일에는 개미 투자자들의 대장처럼 추앙받은 키스 질이 1860만달러(약 207억원)가량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5000만~1억원까지 손실을 봤다고 계좌를 인증하는 글이 10여 건 올라왔다.
문제는 국내에선 게임스톱 사태의 일면만 보고 공매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만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한 주식시장 불안을 이유로 작년 3월부터 1년간 공매도를 금지했지만 다음 달 공매도 재개를 앞두고 개인 투자자는 물론, 여당까지 나서서 재개를 반대하고 있다. 결국 금융위원회는 공매도 금지를 5월 3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여당이 작년에 크게 불어난 ‘동학 개미’들 눈치를 보느라 공매도를 매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서울대 경영학과 이관휘 교수는 “공매도는 특정 기업의 주가가 과대평가돼 있다는 사실을 시장에 알려주는 순기능이 있는 제도”라며 “이를 무시하고 공매도 폐지 여론에 숟가락을 얹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야말로 공매도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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