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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 그 애끊는 순간 앞에서 이름 모를 다른 누군가에게 환생의 기회를 선물한 이들은 우리 사회의 숨겨진 영웅들이다. 우리 사회가 계속 환생을 이어가기 위해 남겨진 숙제는 무엇일까. 남겨진 가족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는 아들을 팔지 않았습니다
-기석이 아버지 김태현 씨 이야기
지난 12월 아들 기석 군의 유골함이 안치된 경기 평택시 서호추모공원을 찾은 아버지 김태현 씨.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태현 씨가 아들의 유골함을 향해 뻗은 손끝에선 아직도 애틋함이 묻어났다. 평택=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사실 이 차가 사연이 많아요. 기석이 보내고 이듬해에 장만한 차인데….”
지난해 12월 17일. 경기 평택시 서호추모공원의 주차장을 들어서며 김태현 씨(61)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브레이크를 조금 밟자 덜거덕 떨리는 흰색 K5 승용차. 김 씨는 “백미러도 자동으로 안 접히고 열시트도 없는 깡통차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날 추모공원에 타고 온 차는 아들 기석 군을 떠나보내고 마련한 K5 승용차다. 평택=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김 씨는 9년여 전인 2011년 12월, 열여섯 살이던 아들 기석이를 떠나보냈다. 급성 뇌출혈이었다. 지금보다 더 장기 기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적었던 시절, 그는 아들의 심장과 폐, 간, 췌장, 신장을 6명에게 환생의 씨앗으로 선물했다.
“당시 회사 사무실이 명동에 있었어요. 고(故) 김수환 추기경께서 안구 기증을 해서 ‘아, 장기 기증이란 게 있구나’ 생각하던 정도였는데. 막상 그렇게 어린 내 아들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으니 부디 남의 몸에서라도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지 기석이 생각뿐이었지요. 기석이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더 좋은 세상도 보고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소주를 따르던 동창이 이상한 이야길 했다.
“친구가 그러더군요. ‘그래, 태현아. 내 친구도 어머님이 몸이 안 좋으니까 바로 ‘처리’하더라. 병원비가 몇백, 몇천씩 나갈 것도 부담이고’라고요. 처음엔 멍했다가, 나중엔 이 자식이 미쳤나 싶었죠.”
알고 보니 고교 동창들 사이에서 김 씨는 비정한 아비로 불리고 있었다. ‘어떻게 자식을 그렇게 빨리 보냈냐’는 것이었다. 뇌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또 다른 이는 자기 아내가 폐 이식 받는데 수술비를 1500만 원 냈다면서 6명한테 생명을 줬으니 제가 1억 원 정도는 받았겠거니 하더라고요. 기가 막히는 거죠.”
김 씨 부부는 아들을 떠나보내고 보름 뒤 차를 바꿨다. 지금의 차가 바로 그 차다. 이전 자동차는 기석이가 태어난 해인 1995년에 산 수동 아반떼였다. 연식이 16년이 넘어가다 보니 시속 70㎞ 이상 속도를 못 내는 지경이라 매일매일 아들을 보러 추모공원까지 달릴 수 없어 바꾼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친구들로부터 들리는 이야기가 ‘기석이 보내놓고 돈을 좀 벌었나 보다, 바로 새 차 샀더라’ 이런 말이 돌았대요. 전 지금도 자기 전에, 항상 베개에 머리 닿는 그 순간에, 단 한 번도 기석이 생각이 안 난 적이 없는데….”
기석이의 생전 모습을 간직한 가족사진은, 지금도 여전히 유골함과 함께 놓여 있다. 태현 씨는 한참동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평택=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그는 지난 2013년부터 매달 한 번꼴로 일선 학교에 가 장기 기증을 주제로 강연을 한다.
“장기 기증에 대해 사회가 많이 오해를 하고 있어요. 지금도 장기 기증을 ‘홍보’는 하지만 제대로 알게 교육하지는 않지요. 저는 홍보가 아니라 ‘계몽’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요. 학교에 가서 자라나는 학생들만이라도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강연에 가서는 학생들에게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뇌사와 식물인간 두 가지를 구별하라고. 둘째, 장기 기증이라는 게 있다는 걸 기억하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석이를 기억해 달라고. 기석이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살아있다면 영원히 살아있는 거라고.
태현 씨는 납골당을 나온 뒤에도 한동안 추모공원을 떠나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승현이가 남기고 간 것들
-박승현 씨 어머니 이명희 씨 이야기
눈과 신장을 기증하고 떠난 박승현 씨의 어머니 이명희 씨가 경북 포항시의 자택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다. 포항=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어딜 내놔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태어나서 줄곧 기쁨만 준 자식이었다. 그런 아들의 눈과 신장을 어머니는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해 기증했다. 지난해 아들 박승현 씨를 떠나보낸 어머니 이명희 씨(69)의 이야기다.
의대 재학 시절, 명절을 맞아 본가에 내려온 승현 씨는 가족들과 함께 사진관에 가 멋진 사진을 찍었다. 이명희 씨 제공
승현 씨는 군의관으로 군 복무 중이던 2010년 10월 4일, 차를 몰고 출근하던 길에 교통사고로 뇌를 크게 다쳤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 때였다. 다행히 호흡과 의식이 돌아와 간단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됐지만 오른쪽 몸은 완전히 마비됐고 음식을 씹거나 제대로 삼킬 수도 없었다.
그는 꼬박 9년을 침대에 누워 투병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급작스러운 호흡 곤란으로 뇌사에 빠졌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이 씨 부부는 아들의 일부를 다른 이에게 환생의 씨앗으로 나누어주기로 결심했다.
사고 후 씩씩하게 투병을 이어왔던 승현 씨. 이명희 씨 제공
“승현이도, 남편도 의사였지요. 남편이 그랬어요. 승현이가 못 했던 일 할 수 있게, 줄 수 있는 것(장기)은 다 주라고요. 피부까지도 만약에 쓸 수 있으면 기증하자고. 죽어가는 생명 살리고, 좋은 일을 했으니까, 승현이는 살아있는 거라고. 멀리 있지만….”
이 씨는 “승현이가 기증을 할 수 있는 뇌사 상태로 버텨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기증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아들의 빈자리를 버텼겠는가,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어 못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을 떠나보낸 뒤 주변의 지지는 큰 위로가 됐다. 승현 씨의 포항제철고 14기 동기들은 고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뒤 의대에 갔던 승현 씨를 추모하며 기부금을 걷어 그의 이름으로 모교에 1000만 원을 기부했다. 그러자 동문회 차원에서도 다시 1000만 원을 보탰다. 그를 자랑스러운 포철고인상에 추서해 만장일치로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때 줄곧 전교회장을 맡을 정도로 사교성 좋았던 아들의 친구들은 홀로 남은 어머니를 잊지 않고 챙겼다.
환생의 씨앗을 남기고 간 승현 씨에게 모교인 포항제철고는 지난해 10월 ‘자랑스러운 포철고인’상을 수여했다.
“다들 잘해줬어요. 대구에서 소아과 하는 형직이라는 의대 친구는 항상 아들 생일 때마다 얼굴 보러 오고, 명절마다 한 번도 안 빠지고 우리 선물 챙기고. 이번 추석에도 얘 없는데도 선물을 보냈더라고요. 아무래도 승현이가 기뻐하고 고마워하지 않았겠나….(눈물)”
이 씨는 기증이 흔치 않은 사회 분위기에 대해 “필히 죽어가는 어려운 생명을 살리고 갔다면 가는 이도 얼마나 기뻐하겠냐”며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승현이가 살아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아들 꿈이 ‘사랑받는 동네의사’였거든요. 승현이가 하늘나라에서 지켜보면서 너무너무 기뻐하리라 믿고…. 다시 만나면 고맙고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요.”
지금도 돌아보면 당신의 모습이
-박주언 씨 아내 조귀금 씨 이야기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남편과의 시간을 회상하는 아내 조귀금 씨.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우리 아내는 요리하는 뒷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지금도 주방에서 일을 하다 문득 문득 뒤돌아본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처럼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남편의 모습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곳엔 텅 빈 자리뿐이다.
귀금 씨의 눈길이 닿는 곳엔 남편, 두 아들과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조귀금 씨(58)의 남편 박주언 씨는 2018년 공사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뇌사에 빠진 뒤 장기를 기증했다. 안구부터 피부 조직까지, 기증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기증했다.
“정말로 여느 날과 아무 다를 것 없었던 날이었지요. 제가 서울 북부지검에서 환경미화원 일을 하거든요. 절 아침에 차로 태워 내려다주고 책임자로 있는 공사현장으로 출근했는데 사고가 났다고….”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병원. 잠시 뒤 나타난 의료진은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뇌사 가능성이 높으니 장기를 기증하면 어떠시겠어요.”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지만 아들과 상의 후 조 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을 했다.
“예전에 시골에서 이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사람의 육신이란 게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차피 몸은 썩어지고 다 화장하는데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게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기도 했고요.”
그는 “의료진이 시간이 없다고, 이 순간을 놓치면 아무도 살릴 수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이 가장 크게 와닿더라”며 “떠난 사람은 몸이 아닌 우리 가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증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주언 씨의 생전 모습은 거실 한켠에 놓여 있다. 귀금 씨는 지금도 매일 사진을 들여다본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사체 존중 문화가 강해 뼈나 피부까지 기증하는 ‘조직 기증’은 드문 편이다. 걱정이나 거부감은 없었을까.
“걱정도 있었는데 염하고 입관할 때 보니 곳곳에 신경을 써 예우한 게 느껴졌어요. 피부까지 다 기증했는데 옷도 입혀두고, 손도 장갑 같은 것 끼워두고. 눈에 보일 만한 곳은 붕대로 감고 복부는 솜으로 채웠더라고요. 편안한 모습 그대로였죠.”
조 씨는 “남편은 평생 나의 ‘우상’이었다”고 했다.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고생과 헌신으로 가족을 이끈 사람이에요. 파킨슨병에 걸린 장모를 사위인 자기가 먼저 나서서 모시겠다고 했을 만큼 올곧고 다정다감했던 사람이고요.(눈물)” 조 씨는 “기증은 그런 남편의 품성을 생각하며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나의 우상이었다 라고 표현하는 귀금씨. 둘째 아들 기표 씨는 “아버지가 한없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김동혁 기자 hack@donga.com
“길바닥에 나앉아 살더라도 가족과 함께 사는 게 행복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게 생명인 건데…. 남편의 장기를 받아서 그렇게 가족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생-네 번째 이야기 (https://original.donga.com/2021/rebirth4)
‘환생’은 동아일보가 지난해 창간 100주년을 맞아 출범시킨 히어로콘텐츠팀 2기의 결과물이다. 동아일보가 한 세기 동안 축적한 역량을 집약해 만드는 히어로콘텐츠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협업을 통해 이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장시간에 걸친 깊이 있는 취재, 참신한 그래픽, 동영상, 디지털 기술구현을 통해 독자들의 공감을 높이는 복합 콘텐츠를 지향한다. 지면보도와 동시에 히어로콘텐츠 전용(original.donga.com) 사이트를 통해 기존에 경험할 수 없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 형식을 선보인다.
::히어로콘텐츠팀 2기:: ▽총괄 팀장: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기사 취재: 곽도영 김동혁 김은지 이윤태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장승윤 양회성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김성규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수영, 개발 윤태영 ▽동영상 편집: 김신애 안채원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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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세상은 정말 살 만한 세상인가’ 하는. 뉴스에서 연일 건조하게 흘러나오는 착잡한 사연들. 언젠가부터 사랑, 나눔, 희망 따위 단어는 우리에게 공익광고 속 말들이 돼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손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절박한 순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기 기증인들의 이야기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영원한 작별 앞에서 생명을 선물한 사람들, 그리고 그를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100일간 따라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