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 민주화 운동 시작됐다" vs "금융혁명? 대장개미만 웃을 것"[글로벌 포커스]

뉴욕=유재동 특파원 2021. 2. 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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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공매도 전쟁' 놓고 의견분분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미국 오프라인 비디오 게임 유통업체 ‘게임스톱’이 미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온라인 게임 활황,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등으로 이 회사의 실적 부진과 주가 하락을 예상한 유명 헤지펀드가 공매도에 나서자 개인투자자들이 집단 매수로 대항하는 과정에 주가가 급등하면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다윗’ 개인투자자와 ‘골리앗’ 대형 헤지펀드의 싸움에서 흔히 ‘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가 이겼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양측의 대립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누적된 미 사회의 양극화, 세대 및 계층 갈등을 반영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와중에 세계 최고 부호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 등 유명인 또한 개인투자자의 편에 서서 대중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하지만 실적 호조에 기인하지 않은 주가 급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상식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헤지펀드와 공매도는 악(惡), 개인투자자는 선(善)이라는 도식적 구조를 덧씌우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의견과 “개인투자자의 반란이 빈부격차에 따른 축적된 분노에서 비롯된 만큼 제2, 제3의 게임스톱 사태가 언제든 벌어질 것”이란 반론이 맞선다.

○ 월가를 뒤흔든 개미들의 결집

플레이스테이션, 스위치, 게임팩 등을 판매하는 게임스톱은 1984년 미 남부 텍사스주 그레이프바인에서 설립됐다. 2002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했고 미 전역에 5500개의 지점을 보유한 대형 기업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게임시장이 온라인 위주로 재편되는 와중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한때 주가는 2달러대까지 떨어졌다.

투자자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듯했던 게임스톱의 주가가 급등한 계기는 이사진 변화였다. 지난해 11월부터 “게임스톱의 사업 모델을 온라인과 모바일 중심으로 바꾸라”고 촉구했던 반려동물용품 업체 ‘추이’의 공동 창업자 라이언 코언이 지난달 13일 게임스톱 이사진에 합류하자 개인투자자의 주가 상승 기대감이 커졌다. 연초 10달러대에 불과하던 주가 역시 순식간에 배 가까이 올랐다.

멜빈캐피털 등 유명 헤지펀드는 이때부터 공매도에 나섰다. 공매도는 특정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지 않았는데도 주가 하락을 예상해 해당 주식을 빌려서 내다파는 행위다. 없는 주식을 판다는 의미에서 ‘공(空)’매도로 불린다. 이후 주가가 실제 하락하면 싸게 주식을 사서 갚는 식으로 차익을 얻는 기법으로 주가가 내리면 이익을 얻고 오르면 손해를 본다. 월가에서 ‘공매도의 전설’로 불리는 유명 투자자 앤드루 레프트 시트론리서치 대표 또한 개인투자자를 ‘성난 폭도(angry mob)’로 비하하며 게임스톱 주가가 곧 내릴 것이란 보고서를 공개했다.

개인투자자는 분노했다. 이들의 성지로 불리는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주식토론방 ‘월스트리트베츠’에는 “공매도 세력에 본때를 보여주자. 게임스톱 주식을 사라”는 글이 속속 올라왔다. 상당수는 “금융위기 당시 가족과 주변인이 큰 피해를 입었다”며 대형 금융사와 맞서기 위해 게임스톱을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금융위기 당시 월가 대형 금융사에 천문학적 구제금융이 투입되고 상당수 경영자가 엄청난 보상을 받았음에도 서민과 일반 투자자들은 큰 손해를 입었다며 “게임스톱 매수를 복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외쳤다.

지난달 26일에는 머스크 창업자 또한 개인투자자 편에 섰다. 그는 트윗에 ‘게임스톱’과 ‘맹폭격(stonk)’의 합성어인 ‘게임스통크(Gamestonk)’란 말을 써서 개인투자자의 집단 매수를 독려했다. 이틀 후 게임스톱 주가는 장중 한때 483달러까지 올라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개인투자자는 완승을 거둔 반면 공매도에 투자했던 헤지펀드들은 20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손실을 입었다. 멜빈캐피털은 자산이 반으로 줄었고 레프트 대표 역시 공매도를 중단했다. 짜릿한 승리를 맛본 개미들은 게임스톱과 마찬가지로 ‘동종 업계 내에서 디지털 전략이 뒤떨어졌고 코로나19로 더 큰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를 받은 극장체인 AMC, 생활용품 업체 베드배스앤드비욘드 등을 집중 매수했다. 일부는 은(銀) 매수에 나서 이달 초 국제 은값이 2013년 이후 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 저금리·IT 발전·양극화 분노로 결집

미국 뉴욕 맨해튼 유니언스퀘어 인근에 있는 게임스톱 매장. 최근 개인투자자의 집중 매수로 지난해 한때 2달러대에 불과했던 주가가 지난달 장중 최고가 483달러를 기록했다. 이후에도 주가 급등락이 이어지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일회성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스마트폰과 온라인 증권거래 플랫폼 등으로 주식투자가 대중화한 데다 최첨단 정보기술(IT) 기기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가 대거 출현한 결과라는 의미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대규모 재난지원금 집행, 저금리, 로빈후드 같은 무료 주식거래 플랫폼의 활황 등으로 개인투자자의 투자 여건이 대폭 호전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 예가 온라인 무료 주식 거래 앱 ‘로빈후드’다. 불가리아 출신 블라디미르 테네브와 인도 출신 바이주 바트가 2013년 만든 앱으로 “부자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금융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자”는 취지로 출범했다. 수수료를 크게 낮추고 언제 어디서나 거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식 투자의 높은 문턱을 허물자는 의미다. 그래서 회사명도 영국의 전설적 의적(義賊) 로빈후드에서 따왔다.

‘월스트리트베츠’ 같은 온라인 주식토론방의 활성화로 일종의 집단지성이 발휘될 여지도 커졌다. 이곳에서 정보를 공유하며 똘똘 뭉친 개미투자자들은 대형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부럽지 않은 영향력을 선보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월가 트레이더들은 서로 공모해서 투자하는 게 금지돼 있지만 주식토론방의 개인들은 수천 명이 소액을 모아 엄청난 집단으로 키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일각에서는 개인투자자 결집을 미 금융사 뱅가드그룹의 창업자 존 보글(1919∼2019)이 주도한 ‘시장 민주화 운동’의 21세기판으로 본다. 1975년 뱅가드그룹을 설립한 보글은 개별 주식이 아닌 주가지수에 투자하는 인덱스펀드를 창안해 개인투자자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증시에 참여할 길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이번에 나타난 세대 및 계층 갈등 양상이 특히 젊은층 투자자를 결집시켰다는 분석도 나온다. 게임스톱을 주로 매수하는 연령층은 20, 30대 젊은층이다. 코로나19와 경기 침체 등으로 구직난에 시달리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전염병 대유행의 타격을 적게 받은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의미다.

개인투자자와 맞선 헤지펀드는 일반 상업은행이나 투자은행과 달리 운영 방식과 투자 기법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개인투자자의 접근이 수월하지 않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넘쳐나는 유동성에 부유층만 혜택을 입으면서 월가 금융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헤지펀드에 개인투자자의 분노와 반감이 투영됐다”고 진단했다.

○ “시장 민주화는 허상, 소수 대장 개미만 이익” 비판

실적 부진 기업의 주가 급등이 얼마나 가겠느냐는 반론 또한 끊이지 않는다. 특히 게임스톱 등 일부 종목의 급변동이 미 금융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높다. 실적 호조 같은 펀더멘털이 아닌 특정 집단의 집중 매수로 나타난 주가 상승은 ‘거품’에 불과하며 그 거품이 꺼지면 기관투자가보다 개인투자자가 더 큰 피해를 입는다는 의미다.

‘채권왕’ 빌 그로스는 “게임스톱 실험의 피해자는 자금력, 장기 전략, 전문지식이 없는 로빈후드 투자자들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국 가디언의 케넌 말릭 칼럼니스트는 “레딧 괴짜들의 공격에 ‘봉기’나 ‘금융판 프랑스 혁명’ 같은 수식어를 붙이는 행위는 사태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국내 전문가 또한 동조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가 기업가치와 무관하게 폭등한 상황을 ‘민주주의’라고만 봐도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적은 돈으로 주식 투자가 가능하다 해도 기본적으로 자산 투자는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으므로 개인투자자를 무조건 힘없는 집단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융 전문가는 “주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냉엄한 경제원칙에 의해 결정된다”며 “실적 호조 같은 내재가치가 아닌 여러 사람이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주가 상승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붙인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질타했다. 특히 현 상황이 계속되면 상당수 개인투자자는 피해를 입고 소수의 ‘대장 개미’만 이득을 본다고 우려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등 감독당국이 시장 교란을 막아야 한다는 지적도 등장했다. 스티븐 펄스타인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는 “레딧에 모인 개인들은 공매도로 이윤을 내려는 헤지펀드의 전략을 그대로 모방해 공격적인 ‘콜옵션’을 행사했다. 둘 다 똑같이 빌린 돈으로 투자한 것이고 현 규정상 문제될 게 없다”며 당국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콜옵션은 주가 상승을 예상하고 가격이 오른 주식을 미리 싸게 살 권리를 얻는 투자 방식이다. 중국 경제 전문가 앤디 셰는 1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기고에서 “밀레니얼세대가 힘을 합쳐 공매도 주식을 매입한 이 같은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 많은 헤지펀드와 금융회사가 파산할 것이고 심지어 금융위기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 “제2, 제3의 게임스톱 계속 나올 수도”

이번 사태에 대한 해석과 무관하게 제2, 제3의 게임스톱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은 공통적이다. 개미들이 똘똘 뭉쳐 엄청난 응집력을 행사할 수 있음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젊은층의 분노를 인지한 정치권이 초당적으로 개인투자자에게 호의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셰러드 브라운 민주당 상원의원 역시 “미 노동자들은 월가가 고장 났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월가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경제를 구축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내 강경 진보를 자처하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은 물론이고 공화당 중진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등도 개인투자자에게 불리한 금융체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촉구했다. 미 정치권 인사들이 게임스톱 거래를 일시 제한했던 로빈후드를 일제히 비판하고 일부는 “로빈후드 조사”까지 주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저금리와 넘쳐나는 유동성 등 자산가격 급등을 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여전하고 주식이 부동산 파생상품 원자재 등에 비해 개인투자자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점도 제2, 제3의 게임스톱이 등장할 것이란 전망에 힘을 더한다. 박소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벼락 거지’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현금만 가지고 있으면 투자 소득으로 큰돈을 번 사람들과 달리 언제든 하층민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일반인의 불안감이 주식 투자 광풍을 몰고 온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 임보미·김예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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