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생각의 뒷짐

오수경 자유기고가 2021. 2. 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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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드라마 <런 온> 속 주인공 오미주(신세경)의 직업은 외화 번역가이다. 번역을 위해 같은 장면을 수없이 ‘되감기’해야 하는 직업이다. 언젠가 지인에게서 언어를 번역하는 일이란, 언어와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도록 단어, 행간, 공기 등을 곱씹는 과정 즉 되감기가 중요하다. 그의 이름이 하필 ‘미주’인 것도 흥미롭다. 챕터나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몰아서 주석을 다는 방식을 미주(尾註)라 한다. 미주는 언어나 상황의 의미를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도록 돕되, 본래의 것보다 앞서서 독해를 방해하지 않도록 문서의 뒤에 놓인다. 물론 미주는 각주보다 느리고 불편하다. 미주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책의 맨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의 직업처럼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되감기를 반복하는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오미주의 언어는 느릿하지만 정확하고 사려 깊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요즘 오미주의 이름과 직업의 의미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정보와 지식이 빠르게 생산되며 소란을 일으키는 사회의 역동과 오미주처럼 천천히 곱씹는 사유의 방식이 어쩐지 어긋나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찬찬히 살펴보기보다는 빠르고 선명한 판단을 위해 필요에 따라 ‘클립 영상’처럼 특정 부분만 취사선택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렇기에 왜곡과 납작한 해석이 병증처럼 생기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식과 정보의 풍요가 문해력과 정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복잡하고 비판적 판단이 필요한 상황일수록 산책할 때 뒷짐지고 걷듯, 천천히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오미주가 되감기하는 것처럼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해석해보고, 이런저런 정보나 의견을 맞춰보다 보면, 이해되지 않던 일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지도가 생긴다. 때론 아무리 되감기를 해도 온전하게 이해되지 않거나 오해받을 일이 생기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 적어도 실수하거나 후회할 일은 줄어든다. 물론 이 과정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정보들을 잘 선별할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빠른 결론에 도달하고 싶은 유혹의 샛길로 들어서지 말아야 한다.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낸 결론이 오류투성이일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아집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볼 때마다 절망하곤 한다. 그 의견들이 사회의 ‘일부’일지라도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도 성급하고 협소해졌을까 싶을 때가 많다.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지식과 정보의 축적과 그걸 습득할 기술의 발전이 사회의 성숙과 비례한다고 가정하면 분명 지금이 가장 좋은 사회여야 마땅한데 왜 우리는 도리어 찬찬히 돌아보며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해가는 것일까. 어떤 사안이나 상황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통찰력 있는 언어를 내놓기 위해 중요한 건 오미주가 한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되감기하듯,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들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성스럽게 시간과 마음을 들여 깊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내놓은 언어가 편견, 조롱, 혐오, 몰이해, 왜곡일 확률은 낮을 테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미주와 같은 ‘번역가’의 태도와 ‘생각의 뒷짐’이 아닐까.

오수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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