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핫플레이스는 동네상가.. '슬세권' '배세권' 간다
#1. 지난 4일 오후 7시 서울 마포구 연남동 거리는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라는 애칭이 무색할 만큼 한산했다. 이 거리의 한 일식집은 모든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주인은 오후 9시 정각까지 불을 밝혔지만 끝내 손님은 없었다. 그는 “서울 최고 ‘핫플’이란 동네가 이렇게까지 손님이 없을 수 있냐”고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2.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잠원동 한 아파트 단지 안 상가 카페엔 빈자리가 없었다. 좌석을 찾느라 한동안 가게 안을 서성이다 결국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이가 많았다. 이날 점심때 같은 상가 내 쌀국숫집과 중식당, 냉면집은 가족 단위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코로나가 덮친 지난 1년이 불러온 소비의 변화 중 하나가 동네 상권의 부상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액센추어가 한국을 포함한 각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응답자 56%가 ‘동네(neighborhood) 상점'을 전보다 더 많이 이용한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 79%는 “코로나 이후에도 동네 상점을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재택근무가 늘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장거리 이동은 줄면서 나타난 소비의 ‘지역화(Localization)’ 현상이다.
◇‘슬세권’ ‘배세권’ 인기
서울 성동구 금남시장은 생긴 지 70년이 훌쩍 넘은 소규모 재래시장이다. 2019년 7월, 시장 안에 와인바가 생겼을 때 주위에선 “시장에 무슨 와인바냐”며 시큰둥했다. 코로나 1년을 거치며 이 와인바는 이제 한 달치 예약이 밀릴 만큼 인기다. 가게 주인은 시장 근처에 2호점까지 냈다. 시장 반경 500m 안에 8개 아파트 단지가 포진한 입지가 코로나 위기 속에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슬세권’(슬리퍼를 신고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동네 상권)이 부상하는 코로나 시대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서울의 대표적 도심 상권인 명동·홍대입구·이태원·신촌의 지하철 이용자는 전년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 이들 지역 상점 매출도 큰 타격을 받았다. 신한은행 빅데이터 연구소가 지난해 하반기 서울 지역 제과점의 신용·체크카드 거래를 분석한 결과, 시청(-34.3), 을지로 입구(-19.3%), 서초동(-17.2%), 여의도(-16.3%) 등 상업·업무 지역의 결제 건수는 급감했다. 반면 북가좌동(23.6%), 상계동(21.0%), 도곡동 (11.6%), 북아현(10.2%) 같은 주거 지역은 결제 건수가 오히려 늘었다.
동네 소비가 늘어난 데는 배달 문화 확산 영향도 컸다. 재택은 늘고 외식은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음식을 시켜 먹는 가정이 늘자 배달이 되는 동네 맛집들 인기가 치솟았다. ‘맛집이 근처에 있어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기 좋은 동네’를 뜻하는 ‘배세권’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라면·생수·화장지…‘싼 것’ 더 찾았다
코로나 사태가 낳은 또 다른 소비 트렌드는 극단적인 저가(低價) 상품 선호다. 해외여행길이 막힌 상황에서 백화점 명품 매장에선 ‘보복 소비’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동네 편의점에선 ‘초저가’를 표방한 상품의 매출이 코로나 이전에 비해 급등했다. 유통 업계 관계자들은 “라면·생수·롤휴지처럼 소비자들이 품질 차이를 크게 인식하지 않는 제품군에서 지난해 저가 제품이 특히 많이 팔렸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마트24 편의점이 자체 생산·판매하는 ‘민생라면’은 작년 하반기 매출이 전년 대비 무려 67% 늘었다. 이 라면은 1봉지 390원으로 신라면 가격(830원)의 절반도 안 된다. 화장지와 미용 티슈도 재작년 매출 순위 3~4위에 머물던 최저가 제품이 작년엔 모두 1위로 뛰어올랐다. 대형 마트들도 코로나 알뜰족을 겨냥한 초저가 PB(자체 브랜드) 제품을 쏟아냈다. 롯데마트는 작년 11월 150g짜리 3개들이가 5000원인 참치캔, 7장에 1만1000원인 타월을 내놨다. 업계 1위 브랜드 제품보다 참치캔은 30% 이상, 타월은 10%가량 싼 가격이다. 이마트는 9월 16개 2080원인 순면 생리대를 내놨다. 업계 관계자는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시대 위기감이 만든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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