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병자호란과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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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은 언제일까? 필자는 1636년 12월에 일어난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후 청의 요구로 항복을 상징하는 비석을 세웠던 1637년의 겨울일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의 왕이 오랑캐의 황제에게 항복하면서 받은 자존심의 상처는 눈발의 강추위보다 더 차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1963년의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삼전도비를 반성의 역사로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 근처인 석촌동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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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서 전서(篆書)로 쓰여 있다. 삼전도에 설치하여 ‘삼전도비’라고도 부른다. 높이 395센티미터, 너비 140센티미터이며 이수(?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대형 비석이다. 비의 앞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문자, 왼쪽에는 몽골 문자, 뒷면은 한문을 새겼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다. 1956년에는 문교부 주도로 땅속에 묻는 등 비석의 수난은 이어졌다. 1963년의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삼전도비를 반성의 역사로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 근처인 석촌동으로 옮겼다. 현재의 위치인 석촌호수 쪽으로 옮긴 것은 2010년이다. 삼전도비는 우리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분만을 내걸고 치르는 잘못된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생생하게 기억시켜 주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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