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리며
조선시대 探梅는 고고한 취미
혹독한 겨울 버텨낼 한 가닥 빛
꽃 피면 암울한 나날도 끝날 것
봄의 문턱이라는 입춘을 바로 며칠 전에 함박눈과 함께 맞았다. 실제로 날씨가 풀려서 포근해지는 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24절기 중에 입춘은 각별히 존재감이 넘친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자를 대문에 써 붙이는 풍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계절의 순환으로 볼 때는 며칠 후의 설날이 아니라 입춘이 한 해의 출발점이다. 동지에 최저로 떨어졌던 태양의 힘은 입춘부터 서서히 증가해가고, 얼었던 땅속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지금이야 매화는 봄에 피는 여러 꽃들 중 하나가 되어있지만, 한때는 꽃 중의 꽃이었다. 특히 퇴계 이황의 매화사랑 이야기는 유명하다. 매화 화분을 키우며 애틋한 정이 들었던 그는 서울 집을 떠나 고향으로 갈 때, 매화에게 이런 이별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고맙게도 그대 매화 외로움을 나와 함께 하니,/ 나그네 쓸쓸해도 꿈만은 향기롭다네./ 귀향길 그대와 함께 못 가 한스럽지만,/ 서울 세속에서도 고운 자태 간직하게나.” 그가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저 매화에 물을 주라”는 당부였다.
화가 김홍도도 가난하던 시절에 쌀과 땔감을 사러 시장에 갔다가 희한하게 생긴 매화에 매료되어 다 잊고 그것만 달랑 사서 집에 왔다고 한다.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그가 남긴 매화그림을 볼 수 있어 감사할 일이지만, 그의 가족은 며칠간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다.
조선시대에 책 읽고 쓰기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탐매는 고고한 취미였다. 그들은 매화그림을 그린 병풍을 방에 둘러놓고, 매화 시를 새긴 벼루를 쓰고, 틈틈이 향기로운 매화차를 마셨다. 만개한 매화를 보며 친구들과 술잔을 비우며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매화를 예찬하는 시를 읊기도 했다. 매화를 즐기는 동안 그들은 매화에게서 척박한 여건에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자태라든가 추위를 맨 처음 뚫고 몸소 앞장서는 지도자의 자질을 발견했다. 매화의 우아함 배후에는 고난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감추어진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매화를 덕망이 높은 군자(君子)의 모습 중 하나라고 여기고, 항상 매화를 닮은 사람이 되고자 애썼다.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나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에게 매화의 개화는 또 다른 의미였다. 주위의 모든 것이 얼고 멈춰 버린 혹독한 겨울을 버텨낼 한 가닥 빛이었다고나 할까. 그들은 매화를 곁에 두고 수시로 자신의 고독을 함께 나누었을 것이고, 불확실하고 막막한 현실을 매화의 은은한 향기로 잠시나마 잊었을 것이다. 언젠가 이 상황이 다 지나고 나면, 언젠가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그동안의 고통마저 다 흐뭇한 기억으로 남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지탱했는지도 모른다. 매화의 개화는 그들이 버텨야 했던 시간을 달랠 수 있었던 유일한 위안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너나없이 입춘이 되자마자 꽃봉오리를 찾아 그토록 눈밭을 헤매고 다닌 것은 아닌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취업준비생부터 자기 집을 마련하려는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매화가 피기를 고대한다. 매화의 개화는 춥고 암울한 나날의 끝, 소모적인 기다림의 완결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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