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라이더들이 왜 '갑질' 아파트를 선정했냐고요?
두꺼운 방한복을 입은 이가 헬멧을 쓴 채 현관문을 두드립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배달음식이 온 거죠. 집 안에 있는 이들은 그저 현관문을 열어 음식을 건네받고, 식을세라 포장을 풀기만 하면 됩니다. 음식을 주문한 분들은 보통 이렇게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배달노동자와 마주하게 되죠.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출입문 곳곳을 꽁꽁 걸어잠그고 보안체계를 철저히 해둔 ‘고급’ 아파트단지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아파트에 살고 계신 분들께 질문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혹시 댁에 온 배달노동자가 아파트단지 입구부터 이 현관문까지 힘겹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서 겨우 당도했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만약 그랬다면, 이 아파트는 배달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미 ‘갑질’ 아파트라고 소문이 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한겨레> 사회정책팀에서 노동 분야를 맡고 있는 박준용입니다. 지난 1일과 2일 라이더유니온,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조 배달서비스지부는 배달노동자들에게 제보를 받은 서울 지역 ‘갑질’ 아파트 각각 103곳, 76곳의 이름을 공개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습니다. 이 가운데 다수가 강남구와 서초구에 있는 아파트였습니다. 이 아파트들은 왜 ‘갑질’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 걸까요.
배달노동자들은 이 아파트들을 오가면서 업무 지체에 따른 손해와 인권침해를 겪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고 위험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파트단지 입구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아파트 보안요원이나 경비노동자들이 “단지 입구부터 도보로 배달하라”고 오토바이를 막아서는 거지요. 가장 흔한 사례인데요, 거주자 안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지만 시끄러워서 그렇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이렇게 되면 때로는 수백미터 거리를 배달음식을 들고 오가야 하기도 하는데요, 오토바이로 5분이면 왕복할 거리가 15분에서 20분까지 걸린다고 합니다. 세 곳을 배달할 수 있는 시간을 한 곳에서 써야 하는 거죠. 배달 한 건마다 수수료를 받는 배달노동자들에게 큰 손해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찬바람이 쌩쌩 부니, 그사이에 식은 음식을 배달해야 해서 타박을 듣거나 앱을 통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아파트단지는 각 아파트 건물 입구에서 배달노동자를 한번 더 막아서기도 합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때 “헬멧을 벗으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주민들이 헬멧을 쓴 배달노동자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양손에 배달할 음식을 가득 든 배달노동자가 헬멧까지 벗어 손에 쥐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이용하는 일반 엘리베이터 말고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요구하는 곳도 많았다고 합니다. 어떤 아파트에서는 “일반 엘리베이터에 음식 냄새가 배면 안 되니까”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이럴 때 배달노동자들은 모멸감을 느낍니다. “라이더는 짐짝이 아닌데 왜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할까요.” 배달노동자 홍현덕씨는 말합니다.
신분증 검사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역시 보안이 이유라고 하는데요, 이런 아파트에선 역시 일분일초가 아까운 배달노동자들이 서너명씩 줄을 서서 신분증 확인을 하는 풍경도 벌어진다고 합니다. 배달노동자들은 아파트단지들이 유독 배달노동자들에게만 보안을 이유로 색안경을 낀다고 주장합니다. 업무차 아파트를 방문하는 다른 외부인들은 신분증 검사를 받지 않기 때문이죠. 배달 일을 했던 김아무개씨는 “배달원 때 출입이 어려웠던 아파트였는데, 친구가 살아 놀러 갔더니 아무런 제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러므로 배달노동자들이 아파트에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 생기자 배달대행업계에서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배달대행업체는 해당 아파트단지만 수수료를 더 높게 책정해 배달노동자 보호 장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결국 인식 전환이 핵심이겠지요. 코로나19 재난이 장기화하면서 배달노동자들은 어느덧 우리 삶에서 ‘생명과 안전, 사회 기능 유지를 위해 핵심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라는 의미의 필수노동자가 됐습니다. 그런 이들을 타자화하고, 배제하고, 때로는 멸시하면서 ‘자신들만의 안전’을 위한 성을 쌓는 일이 과연 온당할까요? 혹여나 이들의 존재 가치를 그저 몇천원밖에 안 되는 배달 비용으로 환원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함께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박준용 사회정책팀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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