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연고주의' 투표 높은 벽..유명희, WTO 총장 도전 '분루'

조계완 2021. 2. 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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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세번째 총장 도전도 아쉽게 실패
'기적같은 역전승' 기대·흥분 들떴으나
회원국 '지역·연고' 투표행태 벽 못넘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최종 결선에 진출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희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전 나이지리아 전 재무·외무장관이 지난 7월 15~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각각 출마 기자회견을 할 당시의 모습. 연합뉴스

유명희(53) 통상교섭본부장이 5일 차기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후보직을 사퇴한 건, 지난 가을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66·나이지리아) 후보에게 최종 선호도 조사에서 큰 표 차이로 밀리면서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유 후보가 양자간의 최종 결정전에서 끝내 고배를 마시고만 요인 중 하나로 164개 WTO 회원국 사이에 횡행한 ‘지역주의·연고주의’ 투표 행태가 꼽힌다. 상대 후보가 세계은행(WB)에서 25년간 근무하며 부총재를 지낼 정도로 국제 사회에서 워낙 막강한 ‘정치적 헤비급’ 인물이긴했으나, 유 본부장도 현직 통상장관으로서의 통상 전문성과 ‘K-방역’ 위상을 필두로 팽팽한 경합을 벌였다.

하지만, 이번 사무총장 선출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총장 선출권력’을 행사한 유럽연합(EU·27개국)에게 우리가 “추잡한 지역그룹 힘겨루기 싸움을 하지 말자”고 집중 설득했음에도 이 ‘대륙·지역주의 투표’ 벽을 결국 넘지 못하고 끝내 분루를 삼켜야 했다. 특히 지역주의 투표 경향 속에서도 ‘아시아 국가’ 중국·일본이 선거 시작 때부터 ‘나이지리아 후보 지지’를 선언한 것은 물론 ‘유명희 반대 행동’ 움직임까지 나선 것도 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세번째 WTO 총장 도전도 아쉽게 실패

지난 6월8일(입후보자 등록 시작)부터 시작된 세계무역기구(WTO·스위스 제네바) 차기 사무총장 선출 절차가 5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우리나라는 WTO 사무총장에 이번까지 세번 도전했다. 1994년 김철수 상공부 장관이 출마해 최종 선출에는 실패했지만 대신에 사무차장을 맡았고, 2012년에는 박태호 통상교섭본부장이 출마해 제2차 라운드까지 진출했으나 최종 결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아쉽게도 이번 도전에서도 실패하고 말았다.

9월18일, 유 본부장이 입후보자 총 8명 중에 5명에 안에 들어 2차 라운드에 진출했을 때는 그닥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5명에는 무난히 포함될 것으로 이미 관측된 터였다. 하지만 10월8일, 최종 후보 2명으로 압축된 3차 라운드에 진출하면서부터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야말로 기적같은 역전승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와 흥분이 일었다. 유 본부장이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를 누른다면 지난 50여년간 무역·통상으로 성장해온 한국 경제가 일대 쾌거를 성취하게 된다는 설렘과 긴장감이 정부 안팎에 자못 퍼져 나갔다.

청와대·정부는 일찌감치 유명희 총장 선출을 위한 ‘범정부 태스크포스’(TF·팀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를 가동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기회와 자원을 백방으로 투입해가며 협업·지원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 정세균 국무총리, 산업통상자원부·외교부 그리고 박병석 국회의장까지 전방위로 나서 전세계 각국 외교·통상 각료들에게 유 본부장에 대한 최종 지지·설득을 요청하는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선거를 사실상 총지휘하면서 숨가쁜 ‘정상 외교’를 펼쳤다. 선거 일정이 종료(10월27일)되기 직전에 1주일 동안 인도·덴마크·룩셈부르크·이탈리아·이집트·호주·브라질·말레이시아 등 10여개국 정상과 전화통화를 갖고 ‘유명희 지원’ 총력전을 폈다. 중국·일본·아프리카 쪽은 나이지리아 지지를 이미 표명한터라 우리에게 우호적인 남미·유럽·아시아 국가들을 겨냥해 전략적으로 설득·교섭했다.

앞서 지난 2차 라운드 때에도 문 대통령은 35개국에 유 본부장 지지를 당부하는 친서를 보내고, 독일·러시아 등 5개국 정상과 전화 통화를 했다. 애초엔 유 본부장이 막판 최종 결선에 오르면 문 대통령이 나설 것으로 전망됐으나 최종 2명으로 압축되는 제2차 라운드부터 적극 나선 셈이다. 청와대 설명에 따르면, 이번 사무총장 선거에서 우리 후보를 내자는 의지를 처음에 강력하게 꺼낸 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유럽연합 안에서도 선호 후보를 누구로 결정할지를 놓고 향배를 쥐고 있던 쪽은 독일이다. 문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전화 통화를 갖고 유 본부장 지지를 거듭 요청했었다.

‘기적같은 역전승’ 기대·흥분 들떴으나…

유 본부장 본인도 국제적 지명도·인지도 열세를 극복하면서 ‘분투’를 펼쳤다. 현직 통상장관(통상교섭본부장은 차관급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장관급)으로서 평상시의 업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선거 일정을 치르기 위해 선출절차 본격 시작(7월8일) 때부터 4개월간 강행군을 벌여왔다. 유 본부장은 지난 6월에 입후보한 이후 제1~3차 라운드 선출 일정 동안 미국·유럽(영국·스웨덴·벨기에 등)과 제네바를 4번 잇따라 방문해 20개여국 장관급 인사 및 100여명의 제네바 주재 세계무역기구 대사들을 일일이 접촉·면담하면서 “통상 전문성에 기반한 WTO 개혁 실현”을 강조하며 지지를 요청했다. 유 본부장이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35회)한 뒤 사무관으로 맨 처음에 일한 부서가 ‘세계무역기구과’였다.

유 본부장이 “어려운 여건 속에 만만치 않은 상황을 헤치고 선전하며 분투”(청와대·정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전은 164개 회원국마다 인물보다는 지역적·역사적으로 가까운 후보에 표를 몰아주는 ‘대륙·지역 연고주의 결집’ 행태가 뚜렷했다. WTO 164개 회원국은 아프리카 44개국, 유럽 37개국, 아시아·태평양 49개국, 중남미 31개국, 북미 3개국 등이다. 세계무역기구를 태동기 때부터 이끌어 막강한 영향력을 쥔 유럽연합(EU·27개국·공동 단일 선호 후보 제시)은 당초 3차 최종결선 진출자(2명)로 자신들과 지리적·역사적으로 가까운 두 아프리카 후보(나이지리아·케냐)를 선호 후보로 제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유럽연합 안에서 케냐 후보가 밀리고 유 본부장이 선택된 사정에는 우리 쪽이 유럽연합에게 줄곧 “유럽이 아프리카와 가까운 건 안다. 유럽 회원국들까지 단순히 지역적·역사적 연고에 따른 지지 태도를 보인다면 위기에 빠져 있는 WTO를 개혁하고 다자무역체제를 복원해야할 지금 시기에 유럽이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추잡한 지역그룹 힘겨루기 싸움을 하지 말자”고 집중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최종 선출자 결정에서 독일을 위시한 주요 유럽연합 강대국들이 유명희 대신에 오콘조이웨알라를 선택하면서 승부가 결정되고 말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청와대·정부는 이번 선거전이 시작되기 전에 유 본부장과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2차장 둘 중에 누구를 후보로 낼 것인지를 놓고 검토를 거듭했으나 유 본부장이 도전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인지도·지명도에서는 유 본부장이 낮다고 볼 수 있지만 8개국의 입후보자들 중에서 유일한 ‘현직 통상장관’이라는 점이 어필할 수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전 세계은행 부총재, 그리고 ‘국제통상 헤비급’으로 불리는 아미나 모하메드(케냐) 전 WTO 각료회의 의장이 후보로 나서면서 ‘여성 사무총장’론이 세계무역기구 안팎에서 대세로 굳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이번 선거전은 내내 유 본부장과 오코조이웨알라, 모하메드 등 ‘여성 3파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막강한 총장 선출권력 EU, 끝내 ‘아프리카’ 선택

최종 결선에서는 유 본부장의 통상분야 전문성과 오콘조이웨알라의 정치적 역량 둘 중에 어느 쪽에 무게를 둘지를 놓고 회원국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 본부장은 현직 통상장관으로서 우리가 여러 중견국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두텁게 구축한 상호 신뢰·지지 기반을 갖고 있고, 상대 후보는 제3세계 및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돕는 세계은행에 25년간 근무(부총재 역임)한 정치적 이력을 바탕으로 여러 개도국 각료들과 친분·인맥을 쌓아왔다. 이 두 장점이 서로 대결을 벌였으나, 유 본부장으로서는 164개국의 지리적 분포 등에서 지역주의 투표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다는 평가다.

이번 선거에서 무역통상을 넘어 ‘외교적 접근 전략과 노력’이 부족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유 본부장이 입후보할 당시엔 정부 안에서 회의적인 기색도 있었다고 한다. 한 경제 당국자는 “처음에 외교 쪽에서 당선 확률이 낮다며 발을 빼기도 했다”고 말했고, 선거전 초반에 또다른 고위 당국자도 “외교부가 적극 나서줘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문 대통령이 선거 중반부터 직접 지휘하고 유 본부장이 최종 결선에 오르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긴 했다. 일본은 유 본부장을 기필코 주저앉히려고 고약한 행동에 나섰다는 외신 보도가 있지만, 선출 방식이나 구도상 이번 총장 선출에서 일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긴 어려웠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긴 하다.

유 본부장, 만만치 않은 상황 헤치고 선전·분투

역대 WTO 사무총장을 보면 선진국과 개도국이 번갈아 가면서 맡아왔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번에는 아프리카 지역 차례”라는 설이 제네바 안팎에 퍼져 있긴 했다. 1대 피터 서덜랜드(1993~1995년·아일랜드), 2대 레나토 루지에로(1995~1999년·이탈리아), 3대 마이크 무어(1999~2002년·뉴질랜드), 4대 수파차이 파니치팍디(2002~2005년·태국), 5∼6대 파스칼 라미(2005~2013년·프랑스), 7~8대 호베르투 아제베두(2013~2020년 8월·브라질·잔여 임기 1년 앞두고 도중 사임) 등이다.

이번 선거는 호베르투 아제베도 전 사무총장이 임기를 1년 남겨놓고 갑자기 도중에 사임해 ‘총장 유고’ 사태가 발생하면서 치러졌다. WTO는 새로운 무역자유화 협상인 도하개발아젠다(DDA·도하라운드) 협상이 2001년부터 시작됐으나 사실상 좌초해 조직 무용론이 대두하는 등 오랫동안 무기력 상태에 빠진 채 혼돈의 와중에 있다. 통상 강대국들이 자유무역 규범을 대놓고 무시하는 일이 빈번하다. 배가 표류해 침몰하고 있는데 선장은 도망가버린 형국에서 선거가 치러진 셈이다. 총장 입후보자 모두 “WTO를 구하겠다”고 일성으로 외쳤고, 유 본부장도 “지금은 WTO 운명이 걸린 비상시국이다. 자유개방 무역과 다자주의 무역 체제 존속·복원을 위해 유명희를 선택해달라”고 호소해왔다.

2차 대전 직후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탄생한 가트(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이어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의 결실로 출범(1995년)한 WTO는 유엔(UN) 같은 다른 국제기구에 견줘 사무총장 개인의 권한이 덜하고, 제네바 주재 164개 개별 회원국 대사들이 서로 협력·갈등하며 함께 움직이며 끌고가는 조직이다. 총장 임기는 4년이고 연봉은 약 2억원으로 알려진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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