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이것이 고선웅 표 '폭풍의 언덕'..뮤지컬 '히드클리프'

이재훈 2021. 2. 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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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올해의 신작'
7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서울=뉴시스] 뮤지컬 '히드클리프'. 2021.02.05.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무릇 좋은 각색이란, 원작의 아우라가 만들어놓은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워 새로운 존재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30세에 요절한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을 원작으로 하는 창작 뮤지컬 '히드클리프'는 원작을 뜨겁게 삼켜내며 분투한다.

맹목적인 사랑의 파괴성을 그린 이 고전은 체위 변경이 불가능해보이지만, 극본까지 맡은 고선웅 연출은 원작처럼 모질되 좀 더 처연하고 애틋한 정경을 선보인다.

원작에서 캐서린(뮤지컬에선 캐시)의 그 유명한 대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뮤지컬에선 히드클리프)"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그가 나보다 더 내 자신"이며 "그의 영혼과 나의 영혼은 같아"라는 사랑 고백보다 더 절절한 걸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뮤지컬에선 히드클리프와 캐시가 서로를 향해 주술 외우듯 "나는 너야, 너는 나야"라고 반복한다. 상호작용이 더 집약된 형식으로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가 변주된 것인데, 일종의 '영혼결혼식' 같다.

히드클리프와 캐시는 태생부터 서로를 간절히 원할 수밖에 없다. 캐시의 부친은 갈 곳 없는 히드클리프를 가엾게 여겨 집에 데려온다. 하지만 캐시의 부친은 히드클리프를 자신의 가정에 정식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 캐시의 오빠 힌들리는 히드클리프를 하인 취급하고 다른 하인들도 히드클리프를 박대한다.

그 가운데 캐시에 대한 히드클리프의 선망이 사랑으로, 히드클리프에 대한 캐시의 연민은 애정으로 단단히 뿌리내린다. 히드클리프는 캐시와 정신적으로 교감한다고 생각한다. 캐시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속물 근성을 숨기지 않는 캐시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부잣집 아들 에드거와 결혼한다. 이후 히드클리프는 집을 나가버린다.

[서울=뉴시스] 뮤지컬 '히드클리프'. 2021.02.05.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폭풍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멋진 신사가 된 히드클리프는 힌들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캐시를 되찾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히드클리프의 위악은 극에 달하고 그의 마음과 별개로 캐시의 몸과 마음은 폐허가 된다.

600쪽에 가까운 분량의 소설은 두 시간 남짓한 뮤지컬에 빨려 들어간다. 역동적인 회전 무대 위에서 쏜살같이 흐르는 전개 덕분이다.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고 연출의 손길이 닿은 작품의 주요 정서는 애이불비(哀而不悲)다.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 슬픔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것.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뮤지컬 '아리랑'과 '광주'가 그랬다.

원작 '폭풍의 언덕' 남주인공을 타이틀롤로 내세워 각색한 이번 '히드클리프' 역시 결이 비슷하다. 고 연출의 애비불비적 연출은 비극으로 끝나더라도, 작품에 낭만주의 성격을 부여한다.

'히드클리프'도 마찬가지다. 캐시의 예고된 죽음 속에서 히드클리프의 위악적 욕망은 솎아내 지고, 그의 치기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후 황량한 현실이 펼쳐진다.

이런 수렁의 끝에서도 희부윰한 희망이 저 멀리서 다가온다. 고 연출의 뮤지컬에선 히드클리프와 캐시의 영혼이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저 무대 끝으로 함께 사라지고 그들의 길을 흰천이 솟구쳐 올라 배웅한다.

[서울=뉴시스] 뮤지컬 '히드클리프'. 2021.02.05.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사실 지독함과 낭만주의는 본래 서로 꼬리를 잡고 있다. 현실에 매이지 않을 때 우리는 지독해질 수 있다. 낭만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낭만이나 지독함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히드클리프와 캐시가 서로를 선택해서 사랑한 것이 아닌, 사랑할 수밖에 없어 사랑했듯이.

비극과 위악과 절망 속에서도 낭만주의를 발견하는 고 연출의 위로는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파괴된 사랑의 폐허 속에서도 사랑은 있다.

뮤지컬 '베르테르'와 '카르멘'에서 고 연출과 호흡을 맞췄던 정민선 작곡가의 실내악 위주의 선율은 튀지 않게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간다. 이진구 작곡가가 함께 음악을 만들고, 편곡과 음악감독도 맡았다. 연주자 8인은 (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고) 상수(왼쪽)와 하수(오른쪽)로 나눠져 입체감을 선사한다.

배우 문경초는 거칠지만 순진무구한 히드클리프 역에 안성맞춤이다. 앳되고 귀여운 외모로 처음엔 캐시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이지수는 앙칼지면서 통통 튀는 매력으로 이 역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래서 처연한 마지막이 더 애달프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0 공연예술창작산실-올해의 신작' 뮤지컬 부분 선정작이다. 오는 7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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