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민주화의 봄'이 좌초된다면..그 책임은 수지도 져야 한다 [김진호의 세계읽기]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2021. 2. 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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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예고된 쿠데타

[경향신문]

중국과 인접한 국가라서 그럴까. 미얀마에서 손님을 맞을 때는 ㄷ자 대형을 갖췄다. 주석단에 양측 대표가 나란히 앉고 양 날개에 다른 사람들이 각각 1인용 다탁을 앞에 두고 앉는 방식이었다. 미얀마 측 주석단에는 대령이 앉았다. 미얀마 외교부 아주국장과 국영 TV방송 사장 등 환영단의 면면은 화려했다. 하지만 대령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굽실거렸다. 허리조차 꼿꼿이 펴지 못했다. 십수년 전 한·아세안 언론인 교류 일환으로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목도한 장면이다.

쿠데타의 주역인 민 아웅 흘라잉 군총사령관과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오른쪽)이 2015년 12월2일 미얀마 수도 네피도의 군총사령관 사무실에서 회의를 갖기 전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달리 필요한 게 없느냐”는 대령의 의례적인 인사 끝에 아웅산 영묘 방문을 희망했다. 공휴일이어서 방문이 어렵다는 미얀마 외교부의 사전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령은 좌중의 외교부 아주국장을 불러 세워놓고 방문 허용을 지시했다. 다음날 아침 휴일이었음에도 문화부 국장이 영묘 앞에 나와 있었고, 우리 대표단만을 위해 문을 열었다. ‘군복’의 위력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지난 1일 미얀마에서 다시 쿠데타가 벌어졌다.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정부가 실각하고 지도자들이 연금됐다. 이상한 쿠데타다. 총성 한번 울리지 않고, 삼엄한 경계도 없다고 한다. 서방은 ‘쿠데타’로 규정하지만, 미얀마 입장에선 헌법 417조에 명시된 군부의 비상사태 선포권 발동이다. ‘선포 범위는 전국, 기간은 1년. 연장 가능’ 역시 헌법에 적혀 있다. 입법·사법·행정권이 군부에 넘어간다.

1일 미얀마의 총성 없는 쿠데타
수지와 NDL 정부는 실각했다
높은 지지율에도 무능한 정치
로힝야 학살·경제 정체의 대가
흘라잉 군부와의 불화도 영향
시민의 민주화 역량은 미지수
유능한 정부 꾸리면 저항 무딜 것

세계가 수지의 진면목을 확인한 건 2016년 로힝야 난민 사태에서였다. 그전까지 노벨평화상(1991) 수상자이자, 미얀마 민주주의의 꽃이었던 수지가 “로힝야는 미얀마 국민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무슬림 학살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넬슨 만델라와 바츨라프 하벨, 아시아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유되던 수지의 노벨평화상을 회수해야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수지에 대한 인상이 워낙 좋았기에 처음엔 ‘스톡홀름 증후군’을 떠올렸다. 군부에 의해 도합 15년 동안 가택연금됐던 그가 오랜 인질생활 탓에 인질범을 두둔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2019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출석한 수지는 군부와 마찬가지로 학살을 두둔하는 확신범임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지도자 자질과 국정능력은 도마에 오른 지 오래다.

수지의 NLD 정부는 그럼에도 작년 11월 총선에서 83%의 지지를 받았다. 군부가 코로나19 상황 등을 빌미로 총선을 1월로 연기할 것을 주장했지만 NLD는 시종 묵살했다. 선거부정 의혹 제기도 무시했다. “작년 10월부터 쿠데타 조짐이 있었다”(박장식 부산외대 교수)는 분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총선에서 받은 높은 지지의 이면도 보아야 한다. “경제 실패를 비롯한 NLD의 무능에 실망이 컸지만, 군부의 재집권 우려 탓에 표가 몰린 측면이 있기 때문”(이백순 전 미얀마 대사)이다.

미얀마 민주주의는 한국적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공식적으로 ‘규율을 잘 지키는 민주주의’다. 1962년 네윈의 쿠데타로 시작한 군벌 지배는 2008년 개헌 이후 잇달아 민주화 조치를 취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수지는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군부는 2011년 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군복을 양복으로 갈아만 입었을 뿐이지만, 테인 셰인 대통령 정부는 2015년 총선에서 수지의 NLD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했다. 헌법상 군부가 상·하원의원 25%를 할당받고, 국방장관과 군, 경찰의 수뇌부를 도맡지만 ‘기회의 창’이 열린 것이다. 이후 5년이 수지가 국가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성공은 대외관계, 특히 대미관계에서 나왔다.

일본 거주 미얀마 사람들이 지난 3일 도쿄의 일본 외교성 청사 앞에서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 | 로이터연합뉴스

그때도 미국의 관심은 중국이었다. 미얀마 군부가 수백명에 달하는 정치범을 전격 석방하자 ‘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조지 부시 2기 행정부의 대북 직접상대(engagement) 정책을 이어받을 것으로 기대됐던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외교력이 미얀마에 집중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크리스 힐 후임인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현 인도·태평양 조정관)가 2009년 미얀마에 급히 파견됐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2011년 말 양곤을 방문했다. 이듬해엔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북한 문제를 주로 연구하던 데렉 미첼을 미얀마 대사로 임명했다. 미국뿐 아니라 각국 지도자들은 앞다퉈 수지와 사진을 함께 찍었다. 역시 ‘장군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도 미얀마 방문을 추진했었다.

미국이 관계정상화 조건의 하나로 내세운 것이, 유엔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으로부터 미사일과 재래식 무기를 수입하던 군사교류를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테인 셰인 대통령은 이를 확약했다. 오바마는 2012년 7월 미얀마 투자 제한 철폐 및 금융활동 허용을 지시하면서 생뚱맞게 북한의 외교 용어인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언급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미얀마 투자 붐이 일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국도 달려갔다. 국제통화기금 통계에 따르면 각국의 미얀마 직접투자(FDI)는 2015년 40억8400만달러로 최고 기록을 세웠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수십년 동안 미얀마의 최대 우방국은 중국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 견제와 대북제재 강화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았다. 수지는 국가고문 자격으로 2016년 백악관을 방문, 투자를 호소했고, 오바마는 미얀마에 최혜국관세(GSP)를 선물했다. 수지 정부 대외정책 성공의 절정이었다. 이듬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했고, 미국은 로힝야 사태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군부 인사들에 대한 인적 제재에 그쳤다. ‘인종청소’ 규정을 한사코 미뤄왔다.

그러나 수지 정부하에서 경제는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상태가 계속됐다. 해외 투자자들은 몰려왔지만 정부 관료들은 무능했다. 박장식 교수는 “군사정부 시절에는 그나마 뒷돈이라도 주고 문제 해결을 했지만 그마저 안 돌아갔다”고 지적한다. 수지는 그 대신 16개 소수민족 무장집단과의 평화과정(Peace Process)에 몰두했다. 소수민족 문제가 1948년 미얀마 독립 이후 오랜 숙원인 것은 맞다.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유업이기도 했다. 문제는 거기에 매달려 정치적·경제적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그마저 로힝야 학살로 빛이 바랬다. 수지 정부의 대외 이미지는 추락했고 2018년 FDI는 12억9100만달러로 떨어졌다.

수지의 정치적 역량은 더욱 문제였다. 군부와 타협하든지, 자체 역량을 키워야 했다. 하지만 NLD 내 후계구도는 물론 제대로 된 정치세력조차 키우지 않았다. 이백순 전 대사는 “NLD는 공당(公黨)이 아닌, 수지의 사당(私黨)”이라고 단언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심복들로만 정부를 꾸려왔기 때문이다. 수지를 평범한 주부에서 일약 영웅으로 만든 1988년 8888민주화 투쟁의 주역들도 키우지 않았다. 수지는 군부에 대해서도 곁을 주지 않았다. 미국의 미얀마 전문가 데이비드 스콧 매치슨은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수지는 지난 5년 동안 민 아웅 흘라잉 군총사령관과 어쩔 수 없는 공식 행사 외에 거의 만나지 않았다”면서 쿠데타 배경의 하나로 감정적 갈등을 꼽았다. 확대하면, 서로 자신들만이 천부적으로 통치권한을 가졌다고 믿는 “버마족 불교도 엘리트와 군부 엘리트 집단 간의 충돌”이라는 분석이다. 군총사령관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늘렸던 흘라잉 장군이 올해 정년이 됨에 따라 권력 연장을 위해 거사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조 바이든 시대 미·중은 경쟁과 협력, 대치의 3중관계를 예고한다. 이번 사태로 미얀마는 미·중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국가로 떠올랐다. 공교롭게 오바마 시대 미얀마 관계정상화를 주도했던 캠벨이 인도·태평양 조정관인 것도 관심을 모은다. 그러나 미국도 중국도 적극적 개입을 주저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무엇보다 미얀마의 전략적 가치 때문이다. 중국은 고립상태였던 미얀마 군부에 각종 무기를 제공한 것은 물론 최근엔 일대일로(BRI)에 따라 막대한 건설 재원을 빌려주고 있다.

벵골만에 면해 있는 항구도시 시트웨에 미얀마의 해군기지 건설을 지원하는 등 인도를 겨냥한 전초기지를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하지만 미얀마가 친중으로 갈 것이라는 분석은 미얀마가 원조 비동맹 국가임을 잊고 하는 판단이다. 2004년 친중으로 가려던 군 출신 킨눈 총리는 14개월 만에 실각했다. 흘라잉 장군은 지난 2일 임시정부의 대외 정책과 관련, ‘비동맹 외교’와 중국과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5대 원칙’을 강조했다. 미얀마는 강대국 간 등거리 외교의 명수이기도 하다.

미얀마는 한편으로 중국이 보란듯이 인도와 국방협력을 강화해왔다. 일본과도 관계를 넓혀왔다. 미얀마 북부의 탕민족해방군을 비롯해 반군을 지원해온 중국에 대한 미얀마 군부의 반중 감정 역시 녹록지 않다. 중국은 곧바로 현상을 인정했다. 왕원민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쿠데타 당일 “미얀마 각측이 헌법과 법률의 틀에서 갈등을 적절히 처리할 것”을 당부하며 안정을 촉구했다.

미국에도 미얀마의 지정학적 위치는 막중하다. 멀리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미얀마는 미국이 장제스 국민당군에 보급품을 수송했던 통로였다. 중국이 벵골만에 진출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강조하는 인도·태평양의 핵심축이 흔들린다. 바이든 백악관이 발생 며칠 뒤인 4일 성명에서나 ‘쿠데타(coup)’로 규정한 까닭일 게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미얀마 군부도 기자가 방문했던 2000년대 초에 비하면 많이 진화했다. 하지만 며칠 새 내보이는 신호는 엇갈린다. 국가고문인 수지에게 외제 무전기 10여대를 불법수입한 혐의를, 윈 민 대통령에겐 코로나19 방역지침 위반 혐의를 각각 죄목으로 댄 걸 보면 구시대 작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11개 부처 각료 인선을 보면 ‘군복’을 배제하고 능력 위주의 테크노크라트를 배치했다는 평가다. 유능한 정부를 꾸려갈 경우 국민적 저항이 무딜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시민의 자체적인 민주화 역량은 아직 미지수다. 8888봉기와 2007년 샤프론 혁명 때와 달리 극심한 경제난도, 유혈 사태도 없다. 혹여 미얀마가 민주화 도정에서 U턴한다면,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수지가 걸머져야 한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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