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발전, 인류를 진보 시켰나 [책과 삶]

문학수 선임기자 2021. 2. 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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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명의 역습
크리스토퍼 라이언 지음·한진영 옮김
반니 | 340쪽 | 1만8000원

“왜 농사를 배워야 하죠? 나무 열매가 지천인데.” 아프리카의 ‘!쿵족’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들은 칼라하리 사막 일대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는데, 누군가가 짐승을 잡으면 한심하다고 조롱하기 일쑤다. “이렇게 뼈다귀만 앙상한 놈을 끌고 가라고 우리를 부른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다.” 그곳에서 관찰을 진행하던 인류학자가 도무지 이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이유를 묻자 !쿵족 남자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어떤 젊은이가 짐승을 많이 잡으면 자기를 대장으로 여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린 그걸 용납할 수 없어요. 자랑하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야 하지요.”

‘평등’을 유지하려는 나름의 지혜다. 그렇게 조롱해도 끝까지 자만하는 이는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자칫하면 죽음에 처해지기도 한다. 이 책에 따르면, 대부분의 수렵채집인들은 평등한 집단을 유지하면서 호혜적으로 살아간다. 북극 에스키모들도 !쿵족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만심을 가라앉힌다. 저자는 켄트 플래너리와 조이스 마커스가 공저한 <불평등의 창조>(국내에도 번역 출간돼 있다) 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식량을 나누는 일은 매우 중요해서 에스키모인들은 먹을 것을 저장하거나 욕심부리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그런 행동을 저지한다. (중략) 실력이 좋은 사냥꾼과 먹을 것을 잘 구해오는 이들은 남들에게 후하고 겸손해야 한다.”

‘!쿵족’의 이름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기원했는데 !는 국제 음성기호로 치경 흡착음을 나타낸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살아가는 이들은 평등사회를 지향한다. 위키피디아
아말감으로 충치를 때우면
문명의 기적에 감사해야 할까
독감을 비롯한 거의 모든 질병
문명화가 우리에게 준 폐해다

책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언은 문명회의론자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통념에 대해서도 고개를 젓는다. “나는 아말감으로 충치를 때웠고 맥주를 냉장고에 보관한다. 내가 모는 일제차에는 자동속도조절장치와 파워스티어링이 장착돼 있다. 내 아버지는 2002년 세상을 떠난 척 조너라는 남자의 간을 이식받아 17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낸다. 그러면 나는 문명이 가져온 수많은 기적에 감사해야 할까?” 물론 저자는 부정한다. “문명의 혜택이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가 이미 대가를 치른 것들에 대한 하찮은 보상이거나 오히려 부작용이 더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감염병은 야생동물이 가축화되기 전에는 인간과 무관했다. 독감, 수두, 결핵, 콜레라, 심장질환, 우울증, 말라리아, 충치, 거의 모든 암들도 문명화가 가져온 폐해다.”

이런 사례도 거론한다. “항공운송이라는 기적을 발명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아서 조종사들은 한손으로는 조종간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민간인들에게 폭탄을 투여했다. 성소수자들과 여성들이 존중받는 곳은 가장 진보적인 몇 나라뿐이다. 대부분의 수렵사회에서는 원래 그렇게 존중받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문명의 장점은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되고 맹목적으로 수용돼왔다. 의문을 제기하면 냉소주의자나 몽상가로 폄하된다.”

책은 반문명 에세이로 읽힌다. 저자는 “한 시대를 떠받치는 망상의 효력이 떨어질 때 그 시대는 끝난 것”이라는 극작가 아서 밀러의 말을 빌려와, “이제 우리 시대를 떠받치는 망상은 수명을 다했다”고 선언한다. ‘발전’ 혹은 ‘진보’의 종언을 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어획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이산화탄소량이 증가하고 방사능 수증기가 대기로 노출되면서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이 우리를 짓누른다. 유출된 원유가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병원균이 항생제를 무력화시킨다. 해마다 최고기온이 경신된다. 각국 정당들은 현 사태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고 해결책에 대해서는 더더욱 엇갈리는 사기꾼들을 공천한다.”

아프리카 ‘!쿵족’·에스키모는
식량에 욕심부리는 행동 저지해
나눔의 삶과 겸손을 가르친다
평등주의와 감사의 마음으로 산
고대인들의 삶은 암담했을까

저자는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한 기간의 95% 이상을 150명 이하의 무리로 이뤄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면서, 현존하는 수렵채집인들의 삶을 추적한다. 아마존 상류의 피라항족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웃는다. 오두막이 폭풍우에 날아가도,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아도, 배가 불러도 배가 고파도 웃는다.” 저자에 따르면 이 낙관과 여유는 “사막에서 선인장이 느끼는 편안함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삶이 쉽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만나는 어려움과 위험은 까마득히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해온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수렵채집인들이 살아가는) 자연 환경은 천차만별이지만 행동과 사회 조직은 거의 비슷하다”면서, “예외 없이 발견되는 특징”으로 “철저한 평등주의”와 “감사하는 마음”을 읽어낸다.

1651년 토머스 홉스는 이렇게 말했다. “1만년쯤 전에 어느 천재가 농업을 발명했고, 그로 인해 인류는 야만적이고 비참한 삶에서 풍요로운 문명, 여가, 교양, 부유함을 누리는 삶으로 발전했다.” 저자는 ‘황당한 궤변’이라고 비판한다. 이른바 ‘영속적 발전론’으로 불리는 홉스의 확신은 “비문명인들의 정신을 매도”하는 몰상식이라는 것이다. 저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에 대해서도 “문명 이전의 세계에 대해 뒤틀린 관점을 설파하는 사람”이라고 힐난한다.

저자의 이력이 독특하다. 영미문학을 공부한 뒤 20년간 세계를 떠돌았다. 책날개에 수록한 설명에 따르면 “알래스카에서 연어 내장을 제거하고, 방콕에서 매춘 여성에게 영어를, 멕시코에서 토지개혁 활동가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쳤다. 뉴욕에서는 번역과 출판 일을 했다.” 이후 뒤늦게 학교로 돌아가 샌프란시스코 세이브룩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전작 중 국내에도 소개된 <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책은 아메리카 라코타족의 위대한 샤먼으로 회자되는 ‘검은고라니’의 말을 인용하면서 끝난다. “세상의 힘이 작용하는 방식은 모두 원형이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와 별들도 공처럼 둥글다고 들었다. 인간의 삶도 어린아이로 시작해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삼라만상은 모두 순환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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