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코로나보다 무서운 그의 입..도쿄올림픽 삼키나
"일련의 언동은 도쿄 대회를 이끄는 책임자로서 실격이다." (마이니치신문)
"올림픽 개최에 결정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폭언이자 망언이다. 신속한 사퇴를 요구한다." (아사히신문)
"올림픽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인물이 조직위원장을 맡아야 한다." (도쿄신문)
2월 5일 일본 주요 일간지의 사설 내용입니다.
신문들은 모리 요시로(森喜朗·83)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장을 '올림픽의 얼굴'로 둔 채 세계에 참가를 설득하기 어렵다면서 일제히 교체를 요구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개막이 채 6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조직위원장을 바꿀 수도, 거세지는 비판 속에 그냥 둘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입니다.
■ 불에 기름 부은 사죄 회견
모리 위원장은 전날 약 20분간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여성 멸시 발언'을 철회하고 사죄
했습니다.
하지만 진정 기미는 커녕 오히려 파문이 커지는 양상입니다. 사과하겠다고 연 회견에서 그는 고개를 단 한 차례도 숙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자와 설전을 벌였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회견문을 흔들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까지 TV 생중계됐습니다.
일본 민영방송 TBS 기자와의 질의응답 일부를 소개합니다.
기자 :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모리 : 몇 개 하지 말고 하나만 물어보세요.
기자 :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분이 조직위원장으로 적임자인가요?
모리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기자 : 저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리 : 그럼 그런가 보죠. (질문 반복되자) 기사를 비틀어서 쓰려고 계속 묻는 거지?
기자 :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어 여쭙는 겁니다.
모리 : (짜증을 내며) 그러니까 아까부터 얘기한 그대로예요.
■ '반성 안 하는' 모습 들키다
'사과'(apology)는 손상되기 전으로 관계를 되돌려놓는 방법(UCLA 인류학자 조앤 실크)입니다. 이를 위해선 사실 인식, 후회, 반성, 보상, 재발 방지 등 5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리 위원장의 회견은 나빠진 관계를 더 악화시켰습니다. 회견을 본 사람 누구도 '진정성'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상황에 떠밀린 사과, 소나기를 피하려는 영혼 없는 사과였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불같은 비난에 기름만 끼얹었으니 안 하느니만 못했습니다.
일본의 위기관리·홍보 컨설턴트인 이시가와 게이코(石川慶子)는 특히 "모리 위원장은 '불쾌한 일을 겪은 여러분께 사죄한다'고 했는데 사과의 핵심 포인트인 '여성'이 빠져 있었다"면서 "말투, 표정, 태도 등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한 회견"이라고 평했습니다.
■ '실언 왕' 모리...입 단속 어렵다
문제는 그의 '입'입니다. 말실수가 잦고 언행이 가볍습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실언 왕'(王)입니다.
모리는 총리로 재임 중이던 2000년,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神)의 나라", "유권자들은 좀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 하나 낳지 않는 여성을 세금으로 돌봐줘야 하는 건 이상
하다"는 등 숱한 설화(舌禍)를 일으켰습니다.
2014년 러시아 소치올림픽 직후엔 피겨 스타 아사다 마오(浅田真央)를 가리켜 "저 애는 꼭 중요한 순간에 자빠져요. 어찌 그러는지…"라고 비꼬아 물의를 빚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외신 기자들로부터 '올림픽 조직위 인사들의 영어 실력 부족을 지적하다'는 질문을 받고서는 "영어는 적국어였다"는 돌출 발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본격 확산하기 시작한 지난해 2월에는 선수들을 향해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한 뒤 "나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끝까지 버티겠다"고 해 빈축을 샀습니다.
이번 '여성 멸시 발언' 하루 전에도 그랬습니다. 3일 일본 집권 자민당과의 회동에선 "인기 있는 연예인은 별로 사람이 모이지 않는 곳에서 달려라. (사람 없는) 논밭에서 성화 봉송하는 게 제일 낫겠다"고 했습니다.
이 발언 직후 일본 유명 코미디언인 타무라 아츠시(田村淳)는 " 연예인은 성화를 들고 논밭을 뛰면 된다? 농사를 짓는 농가에도 실례되는 발언"이라며 예정된 성화 봉송을 거부했습니다.
마치 이번 사건을 예고하듯 일본 스포츠 매체인 도쿄스포츠는 지난달 26일 '모리 회장을 침묵시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기사에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의 회의에서 그가 발언할 때마다 상황이 나빠진다"는 일본 측 참석자의 발언을 소개했습니다.
■ 모리·올림픽, 어느 쪽 구할까
관심은 모리 위원장의 거취입니다. 그의 시대착오적 발언은 '다양성과 조화'를 내세운 올림픽 기본 콘셉트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모리 위원장은 올해 7월로 1년 연기된 도쿄올림픽 개최 준비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조직위원장으로 7년여 동안) 열심히, 헌신적으로 일해왔다. 나 스스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며 사퇴 요구에 선을 그었습니다.
다만 "'늙은이'(老害)가 대형 쓰레기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쓸어내 주면 좋겠다"고 말해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겠다는 뜻도 함께 내비쳤습니다.
다만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의 마크 애덤스 대변인은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관련 질의에 "모리 위원장은 (문제) 발언에 대해 사죄의 뜻을 밝혔다"며 "문제는 종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제 눈길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의 결정으로 쏠립니다. 그는 5일 국회에서 "(모리 위원장 발언은) 올림픽 중요 이념이기도 한 '남녀 공동참가'와는 전혀 다르다"며 감싸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날에도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면서도 모리 위원장 거취에 대해 말을 아꼈습니다.
하지만 여론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논란을 일본 여성의 낮은 지위와 연결짓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트위터에선 '#모리 요시로 씨는 은퇴해 주세요', '#일본의 수치', '#절대로 입 다물고 있지 않겠다' 등의 해시태그가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news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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