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잘사는 추운 나라

김민식 기자 2021. 2. 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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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내촌목공소 대표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

척박한 지리적 조건에도 부유

19세기 내내 굶주림으로 이민행

배고픔이 빛나는 사회복지 불러

한국도 북위 38도서 가장 추워

그래도 1인당 국민소득은 1위

북반구에서도 가장 북단에 있는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캐나다. 긴 겨울과 부족한 일조량, 척박한 지리 조건에도 참 잘사는 나라들이다. 그들을 우리는 늘 선진국이라 불렀다. 극지에 다다르기 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툰드라를 이고 있는 북방 지역. 황량한 불모지대 아래로는 거대한 녹색 띠가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고 있다. 타이가(Taiga)다. 타이가에는 세계 수목의 약 30%가 자란다. 지구 행성의 녹색 왕관이라 칭송받는 타이가에 자라는 나무는 주로 가문비나무·전나무·소나무·잣나무다. 한반도에서도 만날 수 있는 우리와 친근한 북방계열 수종(樹種)이다.

흔히들 아마존 일대를 지구의 허파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서아프리카의 가나, 인도차이나 보르네오, 아마존 유역의 밀림 안으로 발을 디디면 서울 도심 남산이나 제주도 한라산 어귀에서 만날 수 있는 굵기의 나무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열대의 이 슬픈 광경을 나는 ‘나무의 시간’(2019)에서도 자세히 언급한 적이 있다. 인도차이나의 밀림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 꼬챙이 같은 나무와 온통 비비 꼬인 덩굴만 보였다. 찾아 들어간 사람이 오히려 정글 풍경 앞에서 머쓱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나무가 서 있었을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벌목꾼의 임도(林道)가 나타났다.

반면, 타이가 광대한 숲은 어떻게 열대우림(rainforest)과 다른 모습을 지키고 있을까. 겨울 추위 덕분이다. 설령 나무를 벌채했더라도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는 원목을 운송할 수 없다. 예부터 내륙 운송은 강을 통했다. 연중 겨울이 9∼10개월, 여름은 고작 2∼3개월, 그래서 타이가다. 지구의 녹색 띠는 고매한 이상을 지닌 사람들의 손이 아니라 추운 기후가 지켰다. 겨울은 이렇게 강하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러시아의 무력이 아니라 모스크바의 추위와 눈보라에 무너진 거다.

동장군이 바꾼 세계사에 한반도도 빠지지 않는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은 단숨에 북진해 압록강을 눈앞에 뒀다. 그런데 계절은 11월, 겨울이었다. 미군과 중국군의 격전지는 개마고원에 있는 함경남도 장진군. 이 전투는 미국 전쟁사의 가장 아픈 패배였다. 그 결과 한반도는 지금껏 분단 상태를 못 벗어나고 있다. 최고의 화력을 뽐내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미군이 한반도 겨울 눈보라에 퇴각했다. 흥남 후퇴다. 직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은 한반도의 겨울을 같은 위도의 일본열도나 지중해 연안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오만한 인간의 작업은 겨울에 여지없이 무너졌으나, 겨울을 자연의 큰 선물로 만든 경이로운 나라들이 세계사의 무대 위로 속속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국가들은 대부분 임산대국이니, 나무를 쫓아다니던 나는 자연스레 추운 날씨의 타이가 지역대에 익숙해졌다. 햇볕 하나 변변치 않은 곳에서 어떻게 이런 복지국가를 만들었을까. 게다가 일 년 내내 휴가밖에 없는 듯했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높은 생산성 지수’에는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OECD가 발표하는 국가별 노동생산성 상위국을 보면 언제나 노르웨이·아이슬란드·룩셈부르크다. 변변한 경작지 하나 없는 겨울 나라 사회의 안전망과 풀뿌리 시민들의 양식(樣式)은 그냥 동화였다. 그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윤택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었을까. 살펴보니 아주 최근의 일이다. 19세기 내내 스웨덴은 매년 총인구의 1%가 미국·캐나다행 이민 대열에 나섰다. 기근 때문이었다. 1860년대 몇 해는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아 대기근의 참상이 중세 페스트가 유럽을 휩쓴 듯했다. 같은 권역의 아일랜드·노르웨이·핀란드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주림(SULT)’을 보자. 오직 배고픔이다. 마지막 장면,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던 주인공 ‘나’는 해외로 출항하는 배에 무작정 오른다. 소설은 1890년 노르웨이 오슬로의 풍경이다. 그런데 세기를 넘어 이어져 온 재난 ‘배고픔’이 사회복지 제도를 불렀다. 이런 아이러니가? 복지라는 자비(compassion) 시스템이 굶주려 찌든 사회를 급속히 안정시키고 산업화에도 성공했다. 추운 기후로 감자를 수확하지 못해 대대로 굶주렸던 사람들이 불과 100년 사이 현대사가 주목하는 스칸디나비아 사회복지국가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블룸버그통신이 ‘2020년 한국의 국민총생산이 G7 국가 이탈리아를 넘어섰다’는 뉴스를 전한다. 더한 일도 이미 벌어져 있었는데, 2018년을 기점으로 1인당 실질 구매력이 일본을 추월했단다. 깊은 겨울에 듣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한국인의 경쟁력과 강인함을 생각한다. 추위와 배고픔. 스칸디나비아만 아니라 추위는 한국인들을 담금질했다. 북위 37∼38도에 걸쳐 있는 국가 중 가장 추운 나라, 이 위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서울의 위도는 지중해 연안 오렌지와 올리브가 풍성한 아테네·마드리드·리스본과 같지만, 겨울 기후는 북위 59∼60도 노르딕 도시 스톡홀름·오슬로와 다르지 않다. 타이가에서 만나는 북방의 전나무·가문비나무·잣나무 숲이 가득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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