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북한 원전, 헛꿈은 꾸지 말라

기자 2021. 2. 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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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운 논설위원

산업부 원전 문건 전문가 작성

제재·비용·여론 장벽 모두 파악

북측에서 먼저 운 띄웠을 수도

제네바 합의도 핵 폐기를 전제

대북 굴종과 집착이 의심 키워

USB·도보다리 대화 다 밝혀야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협상 당시, 로버트 갈루치 특사와 핵 포기를 놓고 싸우던 강석주 외무성 부상은 슬쩍 한마디를 던져본다. “혹시 경수로라도 지어주면 모를까.” 협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미 대표단이 그걸 덥석 물어버렸다. 제네바 합의는 한국 외교의 대표적 실패작이다. 1991년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당시까지도 우리가 가졌던 북핵 협상 주도권을 미국에 넘겨버렸고, 수조 원에 달하는 경수로 건설 비용 대부분도 떠안는 ‘봉’ 신세가 됐다.

문재인 정권에서도 비슷한 실패가 반복되는 것인가. 산업통상자원부 북한 원전 문건이 심각해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다. 문건은 전문가 작품이다. 제재·비용·여론·탈원전 등 추진이 어려운 이유를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보고서를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시켰을까. 원전·북한 전문가들은 짐작하고 있다. 북한에서 먼저 운을 띄웠을 가능성도 있다. 문건은 2018년 4·27 남북 정상회담 직후 작성됐다. 회담 당시 북측에서 “경수로 건설 약속도 안 지켰는데 어떻게 믿느냐”는 식으로 던져봤을 수 있다. 6쪽짜리 문건 내용은 정확하다. 신포 경수로의 역사도, 사용후핵연료 처리의 민감성도 안다. 거의 유일하게 부정확한 부분은 1·4쪽에 등장하는 ‘북한 내 송전망’이다. 신포에서 외부로의 송전망은 당시 논의됐지만 합의되지 않았고, 건설도 되지 않았다. 송전망 건설비가 경수로보다 비쌌기 때문이다. 현재의 북한 송전망도 원전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원전 제공이 북핵 폐기·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제재 해제 등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건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허점은 모든 곳에 있다. 제네바 합의는 동결된 북핵 시설을 폐기하는 시점에 원자로 등 경수로 핵심 장비가 들어가도록 설계됐다. 합의 직후 신포에서는 부지정지 등 공사가 시작됐고, 2002년 북한의 우라늄 농축 핵 개발이 발각될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노무현 정권은 미국 없이 단독으로 공사를 계속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산업부 문건이 제작된 2018년 5월은 4·27 회담이 끝나고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이다. 문 정권 내에 엔도르핀이 최고조로 솟아나던 때다. ‘쇼’밖에 모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 경수로 사업을 시작하고, 추후 핵 동결이나 폐기·반출 시점에 원자로·터빈 등을 제공한다는 제네바 합의 시즌 2를 충분히 생각했을 수 있다. 일단 공사를 시작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음 정권의 문제일 뿐이다.

앞선 정권에서도 추진·검토했던 원전 제공이 문 정권에서 크게 논란이 되는 이유가 뭘까. 탈원전과 정면 충돌되는 일을 추진한 정권의 이중성도 문제지만, 기본적으로 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대북 굴종과 집착 때문에 북한에 몰래 원전을 지어주려는 검토까지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야당에서 나오는 것이다. 문 정권 핵심인 586은 아직 1980년대 운동권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북한·사회주의·수령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동시에 북한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처럼 효과가 큰 선거 이벤트는 없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데도, 북한에 제재 해제·남북 경협 등을 해줄 수 있는 것처럼 사탕발림해가면서 이벤트를 이어가려는 측면도 보인다. 북한도 이제는 그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삶은 소대가리” “특등 머저리” 같은 욕설이 나오는 것이고, 문 정권은 아무 대응도 못 하는 것 아닐까.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민감하고 중요한 얘기를 했다면, 도보다리 산책 당시일 가능성이 크다. 대화 내용은 두 사람만 안다고 한다. 그럴까? 필자는 회담 한 달 뒤 워싱턴을 방문했다. 미 안보 소식통은 도보다리 대화를 남·북·미 혹은 중국 정보기관에서 감청하지 않았다면 책임자가 해고됐을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 진실이 밝혀진다. 북에 건넨 USB 내용도 마찬가지다. 원전 얘기가 없었기를 바란다.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통일을 위해 꿈도 못 꾸냐고 할 것이다. 꿈을 꿀 수는 있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진 공직자들은 절대 헛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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