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원 "서양화 화법으로 동양의 세계관 담았죠"

장재선 기자 2021. 2. 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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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원(65) 작가는 자신의 작품 이미지들을 함께 살피다가 이렇게 물었다.

작품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했기 때문에 한 작가의 작품처럼 보이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자신의 작품세계 변화를 시기별로 정리한 글과 작품 이미지들을 담은 것이었다.

그가 나중에 유럽과 미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에서 작품을 전시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한지 작가'로 알려지게 된 배경에 이런 아픈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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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원 작가가 장판지에 종이판화 기법으로 잉크를 먹여 만든 회화 작품 ‘창-석양(2009)’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M갤러리 제공
‘그림자-숲’, 146×189㎝, 2021.
‘접은 풍경-들풀’, 74×96㎝, 2018.

■ 한지작가 이선원, 17일부터 ‘화업 40년 결산’ 전시회

초기에는 닥 펄프 이용 콜라주

최근엔 종이 물감 이미지 활용

“뉴욕 유학때 서양인 강사에게

한지예술 배울 때 부끄러웠죠

그 이후로 한지 미학에 심취

그림속 자연으로 사람들 치유”

“이것들이 한 사람 작품처럼 보이나요? ”

이선원(65) 작가는 자신의 작품 이미지들을 함께 살피다가 이렇게 물었다. 작품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했기 때문에 한 작가의 작품처럼 보이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한지(韓紙) 작가’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으나, 종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재료와 주제가 계속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대표작을 뽑아 선보이는 전시를 서울 신사동 M갤러리(02-514-2322)에서 연다. 화업 40년을 결산하는 셈이다. 오는 17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전시에 앞서 문화일보에서 최근 만났을 때, 그는 USB를 가져왔다. 자신의 작품세계 변화를 시기별로 정리한 글과 작품 이미지들을 담은 것이었다. “말을 잘하지 못해서 글로 정리해왔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수줍은 성격인 듯 목소리가 낮았으나, 질문에 대한 답은 정연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 2008년 전업 작가로 나서기 전까지 영국과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고, 국내 대학(수원대 미대)에서도 20년간 재직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에 따르면, 닥 펄프를 사용한 초기(1988∼1992) 작품들은 주로 나무의 생명 에너지를 담고자 했다. 닥 펄프에 수세미 등의 섬유 재료를 활용한 콜라주 작업 시기(1993∼2003)엔 ‘바리공주’ 연작에서 보듯 전통적인 여성의 노동을 성찰했다. 나뭇가지를 엮거나 종이를 접고 꿰매는 입체적 조형 작업을 할 때(2004∼2015)도 있었다. 근년에는 종이에 물감이 스며드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이뤄지는 평면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작품 세계가 왜 이렇게 바뀔까? 스스로 의문이 있었으나, 이젠 그게 필연적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양화를 하지만, 동양인인 저의 사고는 산과 물 등의 자연에 열려 있으니까요.”

그는 프랑스 철학자 줄리앙 슈나벨이 책에서 언급한 이야기에 공감한다고 했다. “서양화에서 풍경은 보는 이의 시선에 의해 잘린 것인데, 동양화의 풍경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산과 물이 항상 요동치며 변화하고, 그 안에 작가와 관객이 있는 것이지요. 서양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지만, 동양은 일원론으로 보는 사상 차이가 있습니다.”

그의 근작들은 자연 안에서 인간의 삶을 어우르는 동양적 세계관에 천착하고 있다. 서양화를 하는 여느 예술가들처럼 그 역시 한때 서양 문화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되돌아봤다.

“민속학자였던 아버지(고 이두현 서울대 교수)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했는데, 아버지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어느 때부터 인정했지요. 2003년도 ‘바리공주·바리데기’ 전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것이었어요.”

그는 미국 유학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을 이번에 털어놨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후 뉴욕의 예술대인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공부할 때였다.

“당시 미국에서 생태학이 유행하고 종이 예술 르네상스가 왔는데, 여름학기의 서양인 강사가 한국의 전주에서 페이퍼 메이킹을 배워왔다며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한국인인 제가 전주에 못 가본 채 뉴욕에서 그것을 배우고 있는 게 창피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학생인 척했어요.(웃음)”

그는 귀국 후 전공인 판화 작업을 하면서도 전주와 원주 등을 다니며 한지 미학을 익혔다. 그가 나중에 유럽과 미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에서 작품을 전시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한지 작가’로 알려지게 된 배경에 이런 아픈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자(Shadow)’ 연작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 휴식을 주고 싶다고 했다. “전에는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쑥스러웠으나, 감염병 사태를 겪으며 저에게도 소망이 생겼습니다. 저의 그림 속 자연을 통해 사람들이 고통을 치유하고 편안함을 느끼셨으면 좋겠다는….”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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