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녹취록 파문' 치욕의 사법부..거세지는 김명수 책임론
野, "사법부 독립 훼손"..與 "난폭운전 처벌한 것"
(시사저널=이혜영 기자)
헌정사 초유의 법관 탄핵과 녹취록을 둘러싼 대법원장의 거짓 해명이 동시에 터져나오면서 사법부가 휘청이고 있다. '사법의 정치화' 논란 한 가운데 서게 된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야권의 거취 압박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여권은 김 대법원장에 대한 공식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보궐선거를 앞두고 불거진 또 다른 악재에 곤혹스런 입장이다.
'거짓 해명' 논란 자초한 대법원장
김명수 대법원장은 4일 임 부장판사와 나눈 대화 녹취록이 공개된 후 그간 밝혀왔던 입장이 거짓으로 드러난 데 대해 "실망을 드린 모든 분께 깊은 사과와 죄송하다는 말씀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불과 하루전까지도 사의를 표명했던 임 부장판사에게 '국회의 탄핵 추진'과 관련한 내용을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녹취록이 공개되자 결국 물러섰다.
녹취록에 따르면,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사의를 표명한 임 부장판사에게 "툭 까놓고 얘기하면 지금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를 수리했다고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나"라고 말했다. 김 대법원장은 임 부장판사의 중도 사직을 만류하는 차원에서 사표를 반려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대법원장이 여권의 동향을 살펴 판사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한 것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국회에서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이 추진되고 있음에도 "탄핵은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권한"이라며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거리를 둔 점에 대해서도 사법부 수호 의지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 부장판사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어 탄핵이 실효성 없는 사법부 길들이기 차원이라는 비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법원장이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내지 않고 유야무야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찬성 179표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최종 판단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재는 전날 오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이탄희 의원 등으로부터 국회가 의결한 탄핵소추 의결서 정본을 받아 사건 접수를 마친 뒤 본격적인 사건 심리 절차에 착수했다. 통상 헌법소원 사건은 본안 심리에 앞서 적법성 요건을 갖췄는지를 판단하는 사전심사를 거쳐야 하지만, 탄핵소추 사건은 곧장 전원재판부로 회부된다. 재판부는 임 부장판사의 탄핵소추 사건을 검토한 뒤 조만간 변론기일을 잡아 임 부장판사 측의 의견을 들을 예정이다.
사법부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임 부장판사를 비롯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국정농단 혐의로 줄줄이 재판을 받은 것에 이어 초유의 법관 탄핵과 대법원장 처신 논란까지 더해지며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된 셈이다. 사법부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비판 속에 논란을 잠재우기는 커녕 불을 붙인 김 대법원장의 처신을 두고 사퇴 압박과 책임론도 한층 거세질 전망이다.
정욱도 대구지법 부장판사는 전날 법원 내부망에 '지금 누가 정치를 하고 있습니까'라는 글을 올려 판사들이 이번 일로 동요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언론과 논지에 따라 두 분이 마치 법원 내에서 각각 어느 한편의 정치 진영을 대표하는 양 묘사되고 있다"며 "심각하게 왜곡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 부장판사는 "직무와 관련해 정치를 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은 두 분(김 대법원장과 임 부장판사) 중에 없다고, 적어도 그렇게 볼 근거가 현재로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탄핵도 비판도 정치 과정의 하나이고 헌법상 보장되는 일이지만, 사법부 구성원들까지 외부의 부당한 정치화에 휘말려 자중지란을 벌이는 일이 부디 없기를 바란다"고 썼다.
野, 김명수 공세 고삐…與, 반응 자제하며 신중
야당은 여권의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 추진과 김 대법원장의 '정치적 행위'를 싸잡아 비판했다. 5일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전날 국회에서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데 대해 "목적·절차·내용에 있어 모두 부실 불법 탄핵이고, 탄핵제도의 남용 사례로 교과서에 남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 원내대표는 "오히려 탄핵을 당해야 할 사람은 김명수 대법원장"이라며 "김 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을 지켜내기는커녕 오히려 사법부 독립을 본인이 훼손했다"며 "엄청난 탄핵 사유가 있다"고 쏘아붙였다.
국민의힘이 김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을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김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역시 사법부 독립 훼손의 소지가 있고 탄핵안이 기각되면 오히려 김 대법원장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탄핵안 발의로 가자는 의원들이 많다"면서도 "이것이 사법부를 흔들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의견을 모으고 더 신중하게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오전 대법원 앞에서 '민주당과 탄핵거래한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퇴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열었다. 김 의원은 전날 국회에서도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 움직임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여당은 이번 사안이 김 대법원장의 녹취록 공개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회의 법관 탄핵소추에 대해 "삼권분립이라는 민주 헌정 체제가 처음으로 작동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정부 수립 이래 독재 권력에 휘둘린 사법의 숱한 과오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번이 최초의 법관 탄핵이라는 것이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야당은 사법부 길들이기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타성적인 잘못된 비난"이라면서 "난폭 운전자 처벌을 운전자 길들이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또 "언제부터인지 판결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면서 "이번 탄핵 계기로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진정한 사법부 독립을 지키길 바란다"고 전했다.
판사 재직 시절 사법부의 국정농단 행위를 확인하고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뒤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을 주도한 이탄희 민주당 의원은 "지난 한달간, 국회의원으로서 제게 부여된 헌법상 의무와 제가 정치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부여한 소명을 이행하는데 최선을 다했다"며 "이제부터는 헌법재판소의 몫이다. 좋은 결정을 기다린다"라는 짧은 글을 SNS에 올렸다.
정세균 국무총리도 이번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정 총리는 전날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이 김 대법원장을 비판하자 "(법관 탄핵소추를) 정권과 짜고 했다는 말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판사님들도 법 앞에 평등하다"며 "거의 모든 판사님은 법을 잘 지키고 헌법을 어길 일이 없으니 그런 대상이 될 리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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