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한국이 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할 수 있었던 이유

2021. 2. 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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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이름까지 바꾸며 국권 회복 나선 체육인 신국권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
한국인에게 올림픽이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도쿄 올림픽이 2021년 7월로 연기되었지만 개최가 될지 현재로서는 불투명한 상태이다. 다만 일본 정치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도쿄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할 것이다. 그만큼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이면서 한 국가의 경제상황에도 막대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인들에게도 올림픽은 4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세계인의 축제 이상의 뜻 깊은 기억들이 각인되어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마라톤 선수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서 금메달을 땄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비로소 한국인으로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회자되곤 한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사연들이 올림픽 무대에서 만들어졌다.

한국 올림픽 역사는 1948년 런던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공식 출전한 대회이고, 이 때 단장은 정환범이며, 부단장은 신국권(신기준)이다. 한국인들에게 신국권은 낮선 이름이다. 신기준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신국권은 중국으로 건너가 지은 이름이다. '國權' 즉 국권 회복을 위해 자신을 담금질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독립운동가 신국권과 스포츠맨 신국권

신국권은 1896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배재학교를 나온 뒤 상해로 건너갔다. 1915년 남양대학에 입학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선우혁, 양준명 등과 함께 교통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다음해 2월 외무부 외사국장을 맡았으며, 8월 미국의원단이 남경으로 향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신국권을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4년 그는 2.8독립선언의 주역이자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던 독립운동가 김상덕과 함께 상하이 3·1堂에서 청년동맹회를 설립하였으며,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신국권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체육 활동을 병행하였다. 그가 남양대학에 입학했을 때 스포츠로 인기를 독차지할 정도였다. 축구·농구 등 스포츠에 능했던 덩치 큰 그는 입학하자마자 뛰어난 체육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내 탕원즈(唐文治) 남양대 총장의 사랑을 받았고, 생활비도 지원받았다. 특히 육상·축구·농구·야구·테니스 등 모든 것을 갖춘 그가 세운 110m 허들 학교기록은 수십 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그 운동의 기품이 뛰어나 학교에서도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남양군(南洋君)'으로 불렸으며, 당시 학생들의 우상이 되었다. 이러한 신국권은 전국적인 운동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책을 맡으면서 1923년에는 중국 축구팀 국가대표로 호주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신국권은 체력단련과 국권회복의 연관성을 높이고자 했다. 1922년 8월에는 상해 거주 한인 학생 축구단의 단장으로 전국 순회 경기를 펼쳤다. 경주와 대구를 거쳐 서울에서는 8월 10일 정동 배재학교 운동장에서 불교청년회 멤버들과 축구경기를 벌였다.

또한 상해 대한교민단에서 한인자제들이 인성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 진학의 준비를 위한 중등교육시설의 설립요구를 수렴하여 신설한 기관이었던 고등보습학원의 교사로 1924년 9월 15일 부임하였는데, 그해 12월 폴란드 농구리그에 참가하여 포르투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그 주역이 바로 신국권이었다. 신국권은 당시 중국인들에게 축구와 농구 등 만능 스포츠맨으로 불렸다.

신국권은 보다 체계적인 체육인을 꿈꾸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25년 9월에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오벌린 대학 체육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동포 유학생들의 체육관련 기사 및 미국 프로야구 관전평을 지속적으로 국내 언론사에 송고하였다. 1927년 10월 체육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신국권은 연희전문학교 체육주임을 맡았다.

그는 1928년 12월 중화체육협진회의 초청을 받아 연희전문축구팀을 이끌고 상해로 왔다. 당시 연희전문 축구팀에는 야구의 대명사가 되었던 이영민과 후에 국어학자가 된 정인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들은 부상으로 '동양의 축구 도읍지' 상해에는 가지 못했다.

2년간의 고국 생활을 뒤로 하고 동북 군벌 장쉐량(張學良)의 요청을 받아 동북대학 체육과 주임교수로 활동하다가 1930년 교통대 체육교수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교통대에서 체육발전을 위해 각종 우수인력 선발대회를 개최하였다. 신국권이 상하이에서 스포츠를 통해 한창 이름을 알릴 때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거가 있었다. 바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였다.

그런데 신동지(신국권)가 프랑스 변호사에 위탁하여 법국 영사로 하여금 도산 선생은 절대로 범죄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합법적인 절차도 없이 그를 체포한 것은 누가 보아도 부당한 처사이니 즉시 그를 인도하여 달라고 일경 측에 강력히 요구하려 하는데 지금 그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글은 김홍일의 자서전 <대륙의 분노>에서 신국권이 도산을 구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사실을 기록한 부분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조선의 젊은 청년 윤봉길의 의거가 단행되었다. 그 때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도산 안창호가 일본 영사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 때 안창호의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인물이 신국권이다. 신국권은 당시 상해 남양대학(현 교통대학) 교수였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신국권은 중국 스포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제10회 하계올림픽이 1932년 7월 3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운동장에서 정식으로 개막되었다. 이 때 신국권은 중국 대표 6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가하였다. 당시 중국은 올림픽에 처음 출전하였으며, 8위에 그쳤다.

신국권이 중국의 첫 올림픽 참가 대표로 이름을 올린 중요한 이 대회에, 후일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이상백이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신국권은 올림픽 참가 후 3개월 뒤 자신이 몸담고 있던 교통대 손중산기념관에서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중국의 첫 올림픽 참가 현황을 연설하였다.

런던올림픽 대한민국 부단장으로 참석하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신국권은 상해 교통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체육으로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평가되었다. 그가 해방 이후 고국으로 귀국한 후 처음 맡았던 직책은, 스포츠로는 한국체육회 부회장, 정치적으로는 미군정청 외무처 상해사무소장이었다. 1946년 11월 상해로 부임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전쟁 때 중국에 남아 있던 한국인들의 송환문제를 다루었다.

그가 상해사무소장으로 재직 당시, 상해체육회 초청으로 서울축구단이 상해로 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장제즈(蔣介石)와 이승만이 만났을 때 그는 스포츠를 통한 한중간 역할을 강조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런던올림픽에 참가하였다. 신국권은 한국 선수단 부단장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1948년 8월 30일 YMCA 강당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3천만 동포가 물심양면으로 크게 원조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번 대회를 통해서 우리의 실력도 남의 나라에 뒤떨어지지 않는 것을 알았고 각 종목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것은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운도 나빴다고 생각합니다. 실력은 개인이 내는 것이 아니고 전반적으로 수준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운동 시설을 좀 더 완비해야겠고 또 민족적 협조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보고 듣고 배우고 체험한 것을 건국사업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체육계에 바쳐서 장래 우수한 성적을 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의 이러한 열정이 지금 대한민국을 스포츠 강국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신국권(신기준)은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의 근대 스포츠계에서 한중 양국 문화, 체육 교류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그를 기억하고 소환하는 것은 균형있는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고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한 배려라고 여겨진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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