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재택과 함께한 코로나 1년, 판교의 풍경이 변했다
[ESC : 잇(IT)문계의 재 너머 판교에는]
길에서 픽픽 쓰러지는 중국인 동영상이 소셜미디어를 강타한 게 지난해 1월입니다.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견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얘기에 우리가 모두 두려워했죠. 군 시절 화생방 교육 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무색무취의 생화학 테러’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갈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첫 번째 확진자 발생 한 달 뒤, 그 수가 세 자리로 늘어나 판교 근처로 감염증의 두려움이 몰려올 무렵, 우리 회사도 재택근무를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재택근무나 원격근무라는 건 실리콘밸리나 발리에 있는 고급 개발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죠. 코로나19가 퍼질수록 판교 회사들은 재택근무의 대표 주자로 미디어에 소개되곤 했지요. 분명히 우리 집인데, 모든 게 낯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씻지 않은 채 노트북을 열고 가상사설망(VPN)과 메신저에 연결하면 출근이 완료되는 점은 놀라웠죠. 판교를 오가는 하루 두시간이 고스란히 내 것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좋은 점이 거의 없었습니다.
온종일 무릎 부분이 나온 운동복을 입고 지내다 보니 사회적 자아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되더라고요. 만남이 사라지니 꾸밀 일이 없어졌고, 거울 속 못생긴 원판을 자주 마주하면서 자존감도 떨어졌습니다. 내 노트북에 활성화된 기록이 고스란히 회사 서버에 쌓여 일종의 평가 잣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은 엉덩이를 무겁게 만들더군요. 채팅창이나 화상 미팅을 통해 이야기해야 하는 점도 힘들었어요. 예전이면 그저 의자를 휙 돌려 옆자리 동료에게 말하면 그만이었던 일이 꼬이더군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경우가 없어졌습니다. 말로는 “예스”라고 했지만, 사실은 “노”인 상사나 동료의 속내를 과거엔 미묘한 표정이나 손짓으로 충분히 알아 챌 수 있었는데, 화상회의에선 힘들더군요. ‘회의 공기’ 같은 비언어적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깨달았죠.
화상 미팅은 모이는 수가 늘수록 방해 요소가 제곱으로 늘어났습니다. 크게 들리는 주변 소음이나 갑자기 전해지는 잡소리, 회의 중간중간 카메오로 출연하는 반려동물들, 그리고 등교하지 못한 아이들의 난입. 카메라와 스피커를 끈 채 듣기만 하는 참여자도 있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적응이 안 되는 건 제가 ‘꼰대’이기 때문이겠죠? 갑자기 등장한 아이에게 환하게 웃어준 팀원들이 ‘표준’은 아니라는 걸 이젠 잘 압니다. 툭툭 튀어나오는 우리 아이 때문에 저는 집을 등지고 커피숍이나 스터디카페를 전전했습니다.
미혼인 사우들은 ‘ㄱ기업은 전면 재택인데 우리는 조를 나눠 출근을 시킨다’고 불평하면서 민감해 하더군요. 보육 문제만 해결되면 차라리 회사가 훨씬 편하다는 기혼자들과 확연히 다른 기류였습니다.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고위직일수록 ‘안티 재택’ 분위기이더군요. ‘척하면 딱’ 하던 직원들이 눈앞에 없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조금 익숙해질 때쯤 주변을 살폈습니다. 생산시설과 발맞춰야 하는 제조업 종사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매일 일터로 향하고 있었죠. 감염과 죽음의 공포를 최전선에서 마주한 의료인들은 오죽했겠습니까. 판교에 매몰된 제 시야를 반성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 기미를 보이던 여름과 늦가을, ‘재택 반·판교 반’이라는 또 다른 근무 형태를 경험했습니다. 자주 가던 식당이나 카페 여럿이 폐업한 걸 목격했습니다. 임대료가 비싼 판교는 전형적인 오피스 타운이다 보니 예전에도 금요일이나 주말엔 손님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주요 기업 종사자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판교 유동인구는 여타 지역보다 훨씬 줄었을 테니, 여러 자영업자가 ‘언택트’ 돼버린 건 예고된 수순이었던 거죠.
돌이켜보면 우리 회사도 코로나19 확산세를 무척 두려워했습니다. ‘언택트 수혜주’니 ‘온택트 시대’니 하며 주가가 지금처럼 치솟을지 예측한 사람은 제 기억엔 아무도 없었거든요. 행운은 강자에게 소리 없이 다가왔고, 불운은 눈길 줄 새 없이 약자를 쓰러트렸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생사에 큰 지장 없는 것으로 논쟁합니다. 고민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회복하지 못할 수렁에 빠집니다. 상처에 고통을 받습니다. 오랜만에 출근하면서 ‘임대 문의’ 현수막을 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설 명절이 지나고 코로나19가 물러가면 판교는 다시 열릴 테지만, 더 늘어난 ‘임대 문의’ 안내문을 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소속사’ 생활이 길어야 50대 중반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잇(IT)문계(판교 아이티회사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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