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락된 이들에게 입을 주다

최재봉 2021. 2. 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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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태생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핍 윌리엄스(사진)의 첫 장편소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은 얼핏 영화 <말모이> 를 떠오르게 한다.

이 소설이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 과정을 뼈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1901년 어느 독자가 보낸 편지를 통해 <옥스퍼드 영어 사전> 에 bondmaid가 누락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것은 이 사전 편찬사의 유명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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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지음, 서제인 옮김/엘리·1만8500원

영국 태생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핍 윌리엄스(사진)의 첫 장편소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얼핏 영화 <말모이>를 떠오르게 한다. 이 소설이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 과정을 뼈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다. 주인공인 어린 소녀 에즈미는 아빠가 사전 편찬자로 일하는 편집실을 놀이터 삼아 성장하고 나중에는 아예 사전 편찬 팀에 속해 일하게 된다. 에즈미와 그의 아빠 등 주요 인물은 허구이지만, 사전 편찬 책임자인 제임스 머리와 에즈미의 ‘고모’이자 멘토 역할을 하는 이디스 톰슨, ‘스크립토리엄’으로 불린 편집실 등은 실존 인물이거나 실제 공간이어서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인다.

어른들이 일하는 책상 아래를 기어 다니며 놀던 에즈미는 어느 날 누군가가 떨어뜨린 낱말 쪽지를 줍는다. ‘여자 노예’를 뜻하는 bondmaid라는 낱말 쪽지였다. 에즈미는 쪽지를 챙겨 와서는 가사노동자 리지의 트렁크 속에 넣어 둔다. 실제로 1901년 어느 독자가 보낸 편지를 통해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bondmaid가 누락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것은 이 사전 편찬사의 유명한 일화다. 

ⓒ Andre Goosen

그렇게 버려지거나 유실되어 에즈미의 손에 들어간 낱말 쪽지들이 트렁크에 차곡차곡 쌓이고, 에즈미는 트렁크 안쪽에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이라는 말을 새겨 넣는다. 에즈미가 더 성장해서는 시장에서 만난 메이블 할머니의 상소리와 욕설, 여성 참정권 운동에 관여하는 배우 틸다를 통해 알게 된 성정치 관련 용어 등이 트렁크 속 사전에 추가된다. 같은 낱말이라도 기존 사전과는 다른 뜻풀이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여성 공동체를 가리키는 ‘sisterhood’가 대표적이다. 소설의 주요 시간대인 1900년대 초는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던 무렵이었고, 에즈미와 그의 사전 역시 그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공식 출간된 도서 또는 학자나 문인이 사용한 낱말만을 표제어와 용례로 인정하는 사전 편찬 방침에 맞서 에즈미는 여성들이나 병사들의 입말과 속어 및 은어를 적극적으로 수집해서 그것들을 사전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기존 사전과 언어 체계에서 배제되거나 왜곡된 단어들을 복권시키는 과정을 담았는데, 여성의 경험과 지향이 그 중심을 이룬다. 이 소설의 출발이라 할 bondmaid가 작품 뒷부분에서 ‘연결된 여성’이라는 긍정적인 재해석을 얻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소설 말미에서 이디스 톰슨이 편지에 쓴 대목이 작품 주제를 적절히 요약한다.

“그게 에즈미가 한 일이었어요. 공식 기록에서 누가 빠져 있는지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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