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를 묻는 소설

한겨레 2021. 2. 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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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허구의 장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럴듯한'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현실과 닮았지만, 현실과 똑같지는 않은 소설, 우리가 허구와 사실 사이에서 기대하는 것은 이 절묘한 격차이다.

그럼에도 '어떻게'의 의문이 더 필요한 까닭은 '탄식'하는 것만으로 현실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라가 공개한 파일로 한바탕 격랑이 일었을 것이고, 승연이 아이를 다시 데려오기까지 피말리는 날들이 이어졌겠지만, 소설은 그 사이를 사뿐히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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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인의 책탐책틈][책&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천장이 높은 식당

이정연 지음/한겨레출판(2020)

소설이 허구의 장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럴듯한’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현실과 닮았지만, 현실과 똑같지는 않은 소설, 우리가 허구와 사실 사이에서 기대하는 것은 이 절묘한 격차이다. 믿을 수 없는 사건 사고들을 겪으며, 농담처럼 현실이 더 소설 같아서 소설이 재미가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세상에 이런 일이’가 아니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를 말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 ‘어떻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목도한 후의 탄식이기도 하고, 그 불가해한 일들의 내막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좋은 소설은 이 ‘탄식’과 ‘의문’에 책임을 진다.

<천장이 높은 식당>을 펼치면 현실로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사건들이 폭풍처럼 몰아친다. 때로 자극적 현실의 집합처럼 느껴져 불편하기도 하다. 부정한 계약으로 이득을 챙기는 일이 이렇게까지 상습적으로 지속되고 있다고? 지위에 의한 성폭행으로 노동자의 해고와 자살이 연달아 발생했지만 언론을 동원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회사는 무사하다. 아이를 부정하고 아이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남편은 왜 갑자기 양육권을 주장하면서 혼자 아이를 키운 ‘승연’을 비난하는가. 소설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미투’를 통해 폭로된 권력자들의 성추행, 기업들의 갑질 논란, 파견직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을 접하는 매일의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더 지독하다. 그럼에도 ‘어떻게’의 의문이 더 필요한 까닭은 ‘탄식’하는 것만으로 현실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 역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결말은 절묘하고 영리하다. 성폭력을 폭로하고 해직된 전임 ‘유라’와 동성 성폭행으로 자살한 인턴의 최초 목격자인 후임 ‘승연’이 함께 길을 나섰다. 유라가 성폭행을 당할 뻔했던 과천의 식당을 찾기 위해서이다. 논란을 덮기 위해 회사가 창립 2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한 날, 유라는 현장을 녹음한 파일을 공개했고, 가해자인 본부장과 마케팅 팀장은 해고되었다. 그러나 유라는 여전히 실직 상태이고 승연의 계약직 전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실은 변했다고도 그대로라고도 할 수 없지만, 자신들이 겪은 ‘그 일’들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는 데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유라가 공개한 파일로 한바탕 격랑이 일었을 것이고, 승연이 아이를 다시 데려오기까지 피말리는 날들이 이어졌겠지만, 소설은 그 사이를 사뿐히 뛰어넘는다. 구구절절 고통의 시간을 복기하는 대신 그들은 서로에게 증거가 되어 줌으로써 ‘어떻게’의 의문을 잊지 않는다. 덕분에 ‘어떻게’는 의문일 뿐 아니라 모색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또 살아 나갈 것인가. 좋은 결말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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