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나는 정권이 핑계대는 ‘일부 언론’ 기자다

김광일 논설위원 2021. 2. 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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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언론이 과장·왜곡 보도” 비판 언론에 ‘일부’ 프레임 씌워
집권 세력 비리 밝히는 특종은 항상 우리 ‘일부 언론’이 한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작년 이맘때 문 대통령은 기재부·산업부·중기부·금융위 업무 보고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돌아보면 ‘일부 언론’을 통해 지나치게 공포나 불안이 부풀려지면서 우리 경제 심리나 소비 심리가 극도로 위축된 아쉬움도 남습니다.” 묻고 싶다. ‘일부 언론’이란 어딘가. 자영업 70%가 죽음의 문턱에 와있는 지금도 당시 ‘일부 언론’이 불안을 부추겼다고 보는가.

작년 연말 백신 확보가 늦다는 비판 여론이 들끓자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말했다. “일부 언론은 과장됐거나 왜곡된 보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한국이 ‘백신 지각생’이란 팩트는 이제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데, 지금도 그게 일부 왜곡인가. 지난 25일 홍남기 부총리가 신문 인터뷰를 했는데 제목이 “부동산, 정책 실패로 안 봐 일부 언론이 시장에 불안감 줘”라고 했다. 긴말 않겠다.

국회의원도, 유명 방송인도 지적을 받으면 ‘일부 언론’ 탓을 한다. 어떤 교수는 “일부 언론이 부동산 세금 폭탄이라고 하니 황당할 따름”이라고 했다. 참나. 그래서 오늘부터 나는 그냥 언론인이 아니라 ‘일부 언론인’이다. 저들의 ‘일부 언론’은 “팩트를 왜곡한다, 무책임하다, 우파 쪽 정파성이 강하다” 이런 속뜻을 담아 지지자를 선동한다. 때론 대놓고 “일부 보수 언론”이라고, “조중동”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정부 비판적 언론을 일부 언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한다면 친정부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그것은 기관지(機關紙)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는 기관지가 없으므로 기관지 하면 으레 공산당 기관지를 뜻했던 시절도 있었다. 기관지는 선전 매체다.

저들은 ‘일부 언론’이란 말을 ‘대부분 언론들’과 대칭적인 개념으로 쓴다.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국민들 머릿속에 심으려 한다.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 자신들을 비판하는 언론, 정부와 각을 세우는 언론, 쓴소리를 하는 언론, 정권 귀에는 듣기 싫겠으나 국민들에게는 좋은 약이 되는 소리를 하는 언론, 그게 ‘일부 언론’이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만든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 문건 특종도 일부 언론이 했고,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도 일부 언론이 밝혔다. 살아 있는 권력의 뒤를 파고드는 기자가 일부 언론이다.

구글 검색으로 ‘일부 언론’을 찾아보면 대부분 집권 세력, 친정부 인사들의 전용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언론’이라고 말하는 순간 국민들에게 마취 주사를 놓는다. 부동산 문제도, 세금 문제도, 백신 문제도 항상 일부 언론이 문제였다는 식이다.

집권 세력은 ‘일부 언론’을 ‘일부 국민’이라고 보는 것 같다. 60~70% 국민 여론을 차마 ‘일부 국민’이라고 부를 수 없으니 저들은 ‘일부 언론’이라고 핑계대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같은 당국은 여당 정치인이 말하는 ‘일부 언론’에 대해 정확한 근거를 밝히도록 규정을 만들면 좋겠다. 언론사 숫자, 신문 독자 수, 시청자 수, 청취자 수, 유튜브나 소셜미디어 같은 제3언론 구독자 수 등을 종합한 지표를 만들어서 ‘일부 언론’이란 말을 쓸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기 바란다.

‘일부 언론이 과장했다’는 표현은 광산 지하 갱도와 잠수함 내부의 산소 부족을 맨 처음 알리는 카나리아에게 “너의 울음이 과장됐다”는 것이나 같다. 부풀렸다고? 우리는 제빵사가 아니다. 일부 언론 기자로서 묻는다. 당신들이야말로 일부 정치 세력 아닌가. 집권당이 이번 달 언론개혁법을 밀어붙여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리겠다는 것도 카나리아의 목을 조르겠다는 패악이다.

집권 세력의 비리를 밝히는 특종은 단 하나의 언론이 한다. 진실도 항상 일부 언론이 주장한다. 그래서 우린 때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쓰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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