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영어사전에서 '재벌'이란 단어가 사라지는 날

오관철 경제에디터 겸 산업부장 2021. 2.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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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대표적 한글 경제용어가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등재돼 있는 ‘Chaebol’(재벌)이다. 학벌, 군벌, 문벌, 족벌, 파벌 등의 표현에서 보듯 ‘벌’자가 주는 어감은 그리 좋지 않다. 철저한 가족 승계, 선단식 경영, 재벌 패밀리들의 결속 등 한국 재벌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기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단어가 됐을 것이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겸 산업부장

한국 재벌이 이런 부정적 특성을 벗어던지려면 가야 할 길이 멀지만 3~4세 경영이 본격화되면서 근래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LG전자가 적자에 시달리던 스마트폰 사업 철수 가능성을 스스로 밝힌 것은 파격적이다. 과거 재벌들이 부실 사업·계열사를 질질 끌고 다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사례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결단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핵심 미래사업에 주력하는 모습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로보틱스와 도심항공모빌리티, 차량공유 등 오롯이 모빌리티 사업에 올인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재벌들은 과거 중소기업 영역까지 침범하며 무차별적 확장에 몰두해 왔다. 계열사 독립체제라 해도 실질적으로는 총수 1인의 입김에 좌지우지됐다. 문어발식 확장, 선단식 경영이 저물고 있다고 확언하긴 이르나 현재의 재계 리더들이 선택과 집중의 시간으로 내몰리고 있으며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앞으로 고비용 사업은 축소하면서 과감한 인수·합병, 비주력 계열사 매각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충분하다. 선도기업이라 해도 자신 있는 영역에서 최고를 유지하는 데 너무 오래 집중하다 보면 신기술에 대한 주의와 자금투입을 소홀히 하게 되고, 퇴조를 면키 어렵다는 점에서 앞으로 예기치 못한 격변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국 재벌들은 개발독재 시절부터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정경유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정권이 없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재벌의 특권이 야기한 불평등과 불공정성은 극복해야 할 대표적 병폐로 지적돼 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이 마무리되면서 한국 기업사에서 정경유착의 어두운 그림자는 역사의 한고비를 넘고 있다.

재벌 패밀리를 대표하는 모임으로 불렸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급격한 위상 저하도 한 시대가 청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1일 최태원 SK 회장이 중소기업까지 아우르는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추대된 것은 주목할 만한 행보다. 그가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며 사회적 가치 경영을 주창해 왔기에 대한상의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느냐는 재벌의 변화를 재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3~4세 경영자들 간 공개 회동이 부쩍 잦아지면서 협력을 타진하는 장면도 은둔에 익숙했던 과거 총수들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전기차 배터리, 자율주행차, 정보통신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대기업 간 합종연횡은 바뀌지 않으면 밀려난다는 위기감의 발로일 듯싶다.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한국 재계의 리더들이 새 패러다임으로, 과거의 방식과 완전 결별하고 새로운 기업 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함여유신’(함께 새로이 고친다)의 자세로 재벌의 환골탈태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미래는 예측불허지만 기존 재벌체제가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할은 막중하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단기간에 확립될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에 젊은 오너들이 달라져야 하는 게 고비를 넘는 현실적 방법일 수밖에 없다.

한국 재벌은 과감한 투자와 초격차 기술 확보에 집중하되, 상생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대상이 많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자리를 위협받는 직원들의 고통도 외면해선 안 될 숙제다. 경제민주화는 이제 확고한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재벌 3~4세들은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며 시장의 신뢰를 쌓고, 경영능력을 검증받아야 하는 시험을 아직 완전히 통과하지 못했다.

‘Chaebol’이란 단어에는 한국 재벌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대기업집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재벌 문제가 비단 한국적인 것이냐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경영권이 ‘황태자’ 수업을 받은 직계 자손에게 승계되는 방식이 한국만큼 일반화된 나라는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Chaebol’ 단어가 사라지는 날이 올지는 ‘젊은 회장’들에게 달렸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겸 산업부장 ok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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