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김혜리 대신 나라가 했어야

남정미 기자 2021. 2. 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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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환씨와 딸 사랑이./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터뷰 기사가 나가는 주말 아침이면, 긴장해서 오전 6시부터 눈이 떠진다. 이 사람을 제대로 소개했는지, 혹 오해받을 문장은 없는지 독자 반응을 살핀다. 지난 주말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딸 사랑이(7세)를 키우는 김지환씨 인터뷰도 그랬다. 이 아빠는 ‘혼인외 출생자의 (출생) 신고는 모(母)가 하여야 한다’는 법에 막혀 1인 시위부터 소송까지 온갖 분투를 치른 사람이다. 미혼부란 말 때문에 악성 댓글이 달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이름 석 자를 보고 기우였음을 알았다. 김혜리. 얼굴 보면 누구나 알 만한 미스코리아 출신 중년 여배우다.

김혜리씨는 2014년 초부터 약 6개월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사랑이를 돌봤다. 아이 키워 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이 반나절의 시간 동안 아이 맡길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사랑이 아빠가 그랬다. 출생신고가 안 된 아이는 어린이집에 갈 수 없다. 아기 띠 하고 청소하고, 유모차 밀며 택배 배달했던 사랑이 아빠는 결국 아이 때문에 번번이 잘렸다. 김혜리씨가 사랑이를 봐주면서, 사랑이 아빠는 김씨 집 근처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다. 김지환씨가 사랑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1인 시위하는 모습을 김혜리씨가 우연히 봤을 뿐이다.

아이 둘 키우는 평범한 엄마라는 네티즌이 댓글을 남겼다. ‘자기 자식도 돌보지 않는 세상에서 남의 자식까지 돌보셨다니, 제가 다 감사합니다.’ ‘수십억 기부한 것보다 더 감동적’이란 댓글도 있었다. 이런 댓글이 기사에 1000개 넘게 달렸다. 취재 요청이 쇄도하자 김혜리씨는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썼다. “사랑이로 인해 더 큰 선물을 받은 건 저와 제 딸이었어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사랑이 아버님의 모습은 가끔 힘들다고 투정 부리며 현실을 회피하고 싶던 제게 반성하는 마음과 용기를 줬습니다.” 그 역시 혼자서 딸을 키우는 싱글 맘이다.

사랑이 아빠가 노량진 고시원으로 밀려났을 때, 고시원 주인은 “돈은 있는 만큼만 내라”고 했다. 함께 살던 3명의 고시생 또한 불평 한마디 안 했다. 사랑이 돌잔치도 이 고시생들이 케이크 사 와서 해줬다. 1인 시위 할 때 “필요한 것 사라”며 30만원을 건넨 무속인도 있었다. 김씨가 돈 되는 건 다 팔았는데도 분유와 기저귀 값이 없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할 때였다.

그는 “내가 딸을 키울 수 있었던 건 내 능력도,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도 아니었다”고 했다. “아주 운 좋게 매우 좋은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라고. 김혜리, 고시생, 무속인이 한 선행은 나라가 했어야만 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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